임진왜란 의병장, 가사문학 박인로, 대한광복회 총사령 등 후손
효와 충절의 고향 솔일재(率一齋)는 밀양 박씨 박해(朴咳) 선생의 묘소를 수호하는 재실로 대사헌공파 종회(회장 박동식)에서 관리하며, 대구광역시 수성구 천흘로 62에 위치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고산역 가까이에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박해 선생은 밀직부원군으로 봉해진 대제학 죽은(竹隱) 박중미의 차남으로, 1347년 태어나 우왕 3년(1377년)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국사가 소란하여 청주에서 은거하였다가 현재의 고산지역에 이주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솔일재는 조선 초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대 미상으로 1934년 중창되었지만 이후 1995년 도시계획으로 도로에 편입되면서 재숙소(齋宿所)가 헐려 현재의 솔일재는 1997년 10월에 중창하였다. 솔일재는 정면 5칸 좌ㆍ우측 면 3칸의 겹처마 팔각지붕의 건물로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양측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고, 대문채와 양쪽에 부속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에 솔일재(率一齋)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솔일재(率一齋)의 솔일(率一)은 '한 집안의 인심(人心) 나아가 천하의 인심(人心)을 한곳으로 모은다는 의미'라고 한다. 박해 선생의 후손으로는 병조참의 매헌(梅軒) 박응성 의병장 4부자(四父子)와 조선 중기의 무인이자 가사문학(歌詞文學)의 대가인 가성(歌聲) 노계 박인로 선생, 대한광복회 총사령이었던 고헌 박상진 의사(義士) 등이 있다.
재실 앞에는 병조참의 매헌 박응성 의병장 4부자 순국기념비가 있다. 박응성 장군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셋은 장군과 함께 순국하였기에 이 기념비를 세웠다. 장군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이 침략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고, 왜군을 무찌르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4부자가 전사했다고 한다.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만 개방하는 재실이라 일반인들이 쉽게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솔일재 외관은 자유롭게 볼 수 있고 안내판의 내력을 보면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밀양 박씨 대사헌공파 집안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며 나라 사랑의 의미를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