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는 설을 쇠고 3월이 되면 그해의 모든 농사가 시작되어 보리 밀밭의 잡초 뽑기를 하였다.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논과 밭은 벼, 보리 밀 이모작 농사를 하였다. 가을에 벼를 베고 나면 낮은 지역으로 물이 고이는 논이나 물이 나는 논을 제외하고 보리, 밀을 파종하였다.
논에 벼를 모내기하거나, 밀보리를 파종하려면 먼저 논과 밭을 갈고 쓰레질을 하여 흙을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논과 밭을 갈아엎는 농기구는 소가 앞에서 당기는 쟁기였다. 소가 없는 집은 남편이 쟁기를 잡고 부인, 아들이 앞에서 당기며 논밭을 갈았다.
50년대 중반까지 사용한 쟁기의 상주지역 이름은 ‘훌칭이’였다. ‘훌칭이’는 쟁기 본체 나무 끝에 고정된 쇠 쟁기날이 달려서 논밭을 갈 때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소가 당기는 속도에 맞추어 훌칭이를 조정하면서 따라갔었다. 골을 탈 때는 세워서 잡고 가면 골이 생겼고, 표면의 흙이 밑으로 가고 속흙이 위로 올라오도록 갈아엎을 때는 훌칭이를 45도 정도 비스듬하게 잡고 소를 따라가면서 논밭을 갈았다. 훌칭이는 사람이 조정하지 않으면 깊이 파고들어 가는 단점이 있다. 소도 힘들었지만, 사람도 많은 힘이 들었다.
50년대 후반에 공급된 ‘쟁기’는 쟁기날을 좌우로 돌릴 수 있는 작은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쟁기날이 일정 깊이까지 들어가면 더 들어가지 않았고, 쟁기날을 좌로 돌리고 논밭을 갈면 흙이 좌로 넘어갔다. 논밭 끝에 가서 돌아올 때 쟁기 날을 우로 돌리고 갈면 흙이 같은 방향으로 넘어갔다. 한 손으로 쟁기 손잡이를 잡고 따라갈 수 있어 힘이 들지 않았다. 황소와 암소의 작업능률은 차이가 많았다. 60년대 후반 600평을 암소로 갈 때는 하루가 걸렸으나, 힘이 좋은 황소로 갈 때는 한나절 조금 더 걸려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고 길윤균(79) 씨는 힘들었던 그때를 회상하였다.
포항제철이 준공(1973년 1월)되어 쇠가 풍부해지면서, 쟁기의 본체 나무 부문이 쇠 파이프로 대체되었다. 논밭을 갈 때는 쟁기를 지게에 지고 소를 몰고 갔었다.
70년대 중반 경운기 보급이 늘어나면서 가정에서 소를 키우지 않아 쟁기도 사라졌다. 80년대 중반 트랙터가 확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경운 정지 등 힘든 농작업이 경운기에서 작업능률이 좋은 트랙터로 넘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형 중형 트랙터가 보급되었다. 1990년대 후반 벼농사는 거의 100% 기계화가 되었다. 요즘은 대형 트랙터가 보급되어 작업능률이 더 향상되었다. 경지면적이 적은 농가도 대형농기계를 선호하다 보니, 농기계 활용도가 낮은 것과 농가부채가 늘어나는 것이 문제점이다.
1992년 한강 하류 일산 신도시 개발지역에서 4~5천 년 전의 볍씨 화석이 발굴되어(단국대학교 손보기 교수, 한국선사문화 연구소장) 우리나라에서도 기원전 2,300년경에 이미 벼가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벼를 재배하면서 돌을 깎은 돌 쟁기, 단단한 나무를 깎은 나무 쟁기, 쇠 쟁기를 사용하였다. 쟁기의 사용을 알리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쟁기를 소가 끌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다루왕(서기 33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남해왕(서기 18년) 시대에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농촌진흥청. 쌀 이야기 시리즈(1)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