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주위는 온통 초록 바다
모내기 끝내는 것을 “손 씻는다”라고 했다. 6월을 지나며 모내기도 얼추 끝났다. 손 씻는 집이 늘어나면서 놉 구하기도 쉬워 남은 모내기는 일사천리였다. 들판은 일찍 모내기한 논과 늦게 모내기한 논이 연초록, 초록, 짙은 초록 색깔로 어우러져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1872~1944)의 추상화를 연상시켰다. 그의 추상화는 흰 바탕에 검정 선을 수평과 수직으로 그어 격자무늬를 만들고 그 사각형 몇 군데를 빨강, 노랑, 파랑 칠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가 초록을 싫어했다는 것은 유감이다.
모내기한 지 며칠 안 되는 논은 연두색이고 새 뿌리를 내려 사람한 논은 초록색으로 하루하루 짙어졌다. 모로서는 모판이 친정이라면 모내기한 논은 평생 살아가야 할 시집이었다. 모는 사나흘 간 풀이 죽고 시들다가 한 주간쯤 지나면 생기를 차렸다. 농부들은 언제쯤 모내기 한 논인가를 한눈에 알아봤다.
모가 앓은 동안 사람도 앓았다. 농부의 육체는 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었다. 허리가 쑤시고 손목이 시리고 무릎이 시큰거리고 종아리가 당기고 손발톱이 닳아 손끝에 피가 맺혔다.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서 끙끙거리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일어설 때면 여기저기서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났다. 가난한 농부의 아내는 이맘때쯤 어김없이 생머리를 앓았다. 천지가 빙빙 돌아 변소 길도 힘들었다. 어지럼증에는 장닭 뱃속에 찹쌀 넣고 푹 고아먹는 게 약이었다.
망가지기 직전인 농부들 앞에 다른 일거리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보리타작이었다. 비둘기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듯이 그동안 농부는 하고한 날 무논에 고개를 처박고 모를 꽂으면서도 보리타작 걱정이었다. 날이 쨍쨍하면 이렇게 좋은 날에 타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비가 내리면 보리낟가리 속에 물이 들어가면 어쩌나 걱정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타작 마치기 전까지는 아프면 안 됐다. 장마 전에 안 하면 그해 보리농사는 헛농사였다.
눈코 뜰 새 없던 농촌도 7월에 접어들면 일도 얼추 끝나고 숨 쉴 겨를이 생겼다. 농부는 맥고모자 눌러쓰고 삽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물꼬 보러 다니고 아낙은 그동안 미뤄뒀던 빨래를 했다. 큰거랑 물은 날이 더울수록 시원했다. 맑고 시원한 물에 물고기들이 무성하게 자란 갈대 줄기와 물결 따라 흔들리는 말즘 사이를 헤집고 숨바꼭질을 했다.
농촌에서는 논다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쉬는 것은 아니었다. 소를 먹이고 소풀을 하는 일은 기본이었다. 소를 먹이는 일은 아이들 차지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대로 소를 몰고 갱빈으로 나갔다. 어느 건 소 같이 먹는다고 소의 양쪽 옆구리를 채우는 일은 소풀을 해서 끓이는 소죽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우선 소에게 풀을 실컷 뜯게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또 소죽을 끓여 먹였다.
갱빈은 우시장처럼 소들로 붐볐다. 소들은 무리지어 방천을 거닐며 풀을 뜯었다. 초록빛 풀들이 소 이빨에 뜯기고 소 발굽에 밟혔다. 아이들은 소가 농작물 밭에 들어가지 못 하도록 살피면서 잔디 위를 뒹굴었다. 방천 위에서 바닥까지 굴러 내려갔다. 놀이기구 하나 없어도 즐거웠다. 여자 애들은 치마를 감싸 쥐고 굴렀다. 옷에 풀물이 들었다. 알싸한 풀 향기가 상쾌했다. 소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을 했다. 잠시도 입을 놀리는 법이 없었다.
햇볕이 뜨거운 만큼 들판은 나날이 푸르러 갔다. 비가 내리면 비를 맞는 대로 푸르고 날이 더우면 햇살을 받는 대로 더 짙어졌다. 차례로 덧칠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윤기를 더했다.
농부는 적당한 때 웃비료를 거짓꼴로 뿌렸다. 벼 뿌리를 튼튼하게 한다는 복합비료였다. 푸르러 가는 것은 벼 잎뿐이 아니었다. 논둑과 도랑의 소풀은 그렇게 낫으로 베고 소가 뜯어 먹어도 며칠 지나면 무성했다. 채전 밭의 호박, 오이, 고추, 옥수수는 열매도 잎도 검푸르고 화단의 나팔꽃, 분꽃, 백일홍, 해바라기, 달리아, 과꽃은 싱싱한 잎 위로 꽃대를 올렸다. 과꽃은 당국화로 많이 불렀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것은 버드나무였다. 마을 앞쪽으로 앞실댁과 새깨댁 마당 앞과 동쪽으로 승두네 밭에서 산대댁, 내동댁 밭까지 버드나무가 즐비했다. 감나무는 집집마다 한두 그루 있고 사촌댁과 금호댁 뒤편 울타리는 대나무와 탱자나무가 섞여 자라고 있었다. 감도 탱자도 짙은 초록이었다.
이따금 초록 물결을 건너오듯 들판 길을 걸어 들어오는 장수가 있었다. 단골로 오는 아줌마였다. 참외 고무대야나 멸치젓 양철통을 이고 왔다. 한번은 낯선 아저씨가 호박엿을 팔러 왔다. 엿가위 소리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엿장수는 헌 고무신, 날이 닳은 호미, 빈병, 철사 등을 받다가 나중에는 깨진 옹기조각도 받았다. 엿장수는 술이 취해 있었고 아이들은 간첩일지 모른다고 수군거렸다.
초록빛 여름은 여름방학이 가까워오면서 한층 짙어졌다. 시장이 먼만큼 갱빈이나 채전 밭에서 나는 감자나 옥수수를 삶아먹고 밀가루 빵떡을 쪄서 간식으로 했다. 저녁은 호박잎을 찢어 넣고 감자를 뭉툭뭉툭 썰어 국수나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두세 그릇씩 먹고 방귀를 뿡뿡 뀌고 배탈이 나면 쑥을 찧어 즙을 마셨다. 초록빛 들판 속에 살며 초록 물든 옷을 입고 초록 음식을 먹고 마셨다.
우리나라 민속놀이 중에 ‘호미씻이놀이’가 있다. 음력 7월 15일 백중날이면 벼농사는 물론 밭농사까지 마친 농부는 호미를 씻고 하루를 즐겼다. 이를 ‘백중놀이’라고도 했다. 소평마을은 논농사 일색이다 보니 ‘호미씻이’는 없고 ‘손씻이’를 사용한 게 아닌가 싶다. 이따금 뜸부기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