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고등학교동기들로 구성된 계에서 1박2일의 홍도여행을 통보받고는 불참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안 된다’였다. 이유야 뻔해서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며, 단체 행동에 있어서 개인행동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간 두 번이나 다녀온 홍도, 결국 회에서 부담하는 일정금액을 공제한 나머지를 송금하고는 4월 6일과 7일 1박 2일 여행길에 나섰다.
새벽에 일어나 약속된 장소로 가는 길에 올려다본 하늘이 티 없이 맑다. 범어네거리에서 출발한 버스는 홈플러스 앞에서 만석을 이룬 후 남대구IC를 거쳐 달빛(구:88)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린다. 그동안 태양은 제법 솟구쳐 축복인 양 뒤를 따른다. 차창 밖의 풍경은 겨울옷을 완전히 벗어 봄이 한창이다. 적당한 햇살, 적당한 온도, 적당한 습도와 비닐하우스 위로 빛나는 윤슬이 여행에 거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요즈음은 법이 엄해서 안전벨트는 필히 착용하시고 음주가무는 안되는데...! 음주만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알아서 잘하세요!”하는 멘트에 따라 준비한 술잔을 조용히 기울인다. 봄바람이 차창에서 부드럽게 흐르는 가운데 지리산휴게소와 나비축제로 유명한 함평휴게소를 거쳐 목포로 접어들자 유달산이 가장 먼저 반긴다.
지난 관례에 따르면 배를 타기 전에 목포시내를 관광할 여유가 있었지만 배시간이 12시 30분이라 이른 점심에 승선준비를 마쳐야 해야 했기에 식당부터 들렸다. 몇몇 가지 반찬에 어린 조기를 넣은 찌개로 후다닥 점심을 마친다. 관광지의 식당이 다 그렇듯 숟갈을 채 놓기도 전에 치워도 되느냐는 물음표가 붙는다. 거부하자니 야박해 보이고 허락하자니 뭔가 밑져 보이는 시간이다. 머뭇거리는 시간을 허락으로 알아 벌써 빈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목포항에서 홍도까지는 쾌속정으로 약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여기저기서 멀미약을 먹는 등 잡도리가 분주하다. 그간 몇 번의 경험으로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배에 오르자 “넌 괜찮아?”묻고는 부러운 표정이다. 배에 오르자 일요일의 비 소식임에도 만선이다. ‘이왕 잡힌 일정에 언제 또 와보겠냐!’표정이 강해 보인다. 목포항을 출발한 쾌속정이 해수면위로 미끄러지듯 홍도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박수와 노랫가락이 선실에 울린다.
노래라는 것이 뻔해서 “사랑을 팔고 사는...!”으로 시작하다. 사실 홍도와 노래와는 무관하다. 한문으로 풀면 홍(붉은 홍:紅)과 도(섬도:島)이다. 반면 노래에 나오는 홍도(紅桃)로 붉은 홍은 같지만 도는 복숭아 도로써 영화주제가이다. 아마도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으로 예명을 쓴 것 같다. 하지만 홍도는 이 노래로 인해 시너지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쯤 되면 시끄럽다는 고함이 나올 법도 한데 오히려 동조하는 분위기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시니어들이다보니 이 정도는 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까지 보낸다.
그런데 짙은 해무가 뱃전을 스쳐가는 것이 해상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머피의 법칙처럼 느낌이 좋지 않은 것은 꼭 정 맞다. 3시 즈음에 홍도 항에 하선을 하고보니 태양빛이 해무와 구름 속에서 들락날락 술래잡기를 한다. 저녁시간이 5시 30분, 그 전까지는 자유시간으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해발 365m의 깃대봉으로 향한다. 깃대봉을 왕복하는 시간은 약 2시간 정도로 정상을 하는 경우 저녁은 포기해야 한다. 섬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홍도는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한다. 이것이 육지관광과 다른 점이다. 일행은 깃대봉 대신 저녁을 택했다. 물가가 육지에 비해 1.5배에서 2배정도 비싼 점도 있지만 내일 유람선에서 회를 먹자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5시 30에 식당의 문이 열렸다. 메뉴는 목포항에서 먹은 점심과 대동소이해서 어린조기로 보이는 찌개가 나왔다.
해무가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홍도의 맛을 찾아 항에 있는 포장마차로 향했다. 한껏 기분을 내고자 찾아든 포장마차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가게로 밖이 좋으나 한층 차가워진 공기로 인해 비좁은 포장 안에서 홍도의 밤을 즐긴다. 주로 나오는 회는 전복, 참소라, 해삼 등으로 양도 푸짐했으며 인심도 좋아 “한 마리 더”하면 “그라 지라!”더해진다. 모처럼 섬을 찾은 육지 사람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고는 섬사람이 벼락부자인 줄 알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가 않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별 소득이 없다보니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가보다. 구부러진 허리, 해풍에 그을린 피부가 꾸덕꾸덕하고 헝클린 머리에서 세월의 덮개가 무거워 보인다.
숙소에서 기다리는 부인들을 위해서 넉넉하게 준비한 회를 들고는 비탈진 언덕길을 오른다. 홍도는 1구와 2구로 나누지만 대부분이 1구에 산다. 그렇다고 1구의 환경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홍도 항에서 몽돌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길은 경사도가 상당해서 웬만한 사람도 숨소리가 거칠다. 오늘밤이 마지막이란 생각에 힘을 내는 등 뒤로 스멀스멀 해무가 따른다. 빙 둘러앉은 술자리에서도 이야기꽃이 만발한 중에 은근슬쩍 끼어드는 것이 날씨이야기다.
고릿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골방늙은이, 새벽잠이 빨라 3시 30분에 일어나 부산하더니 4시경이 이르자 급기야 셋이서 머리를 맞대더니 깃대봉으로 향한다. 기왕에 설쳐버린 잠, 코를 곤다. 이를 간다. 등등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5시의 알람이 울기도 전에 이부자릴 터는데 깃대봉으로 출발한 녀석들이 호기 있게 들어와 정상 자랑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은 결코 정산을 밟지 못했다. 모르는 척 속아주는 재미도 의외로 쏠쏠하여 “그 시간에 대단타.”장단을 맞추자 더욱 의기양양하다. 세안 등등 모든 준비가 끝나자 6시에 맞추어 식당으로 향한다.
아침이 끝나고 부두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여 밝지가 못하다. 이 시간쯤이면 손님을 맞으려는 유람선이 시동을 걸어 줄을 서야겠지만 아직까지 깊은 잠에 빠져있다. 급기야 숙소로 돌아가라는 가이드의 안내에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끼며 어젯밤 마지막이라 오르던 길에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런데 의외로 방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그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역시 술이다. 몇 순배의 술잔이 돌자 “까짓거 놀자!”여유만만 호기다.
당초 7시 30분에 섬을 돌 예정인 유람선이 날씨관계로 근 11시가 되어서 출발이다. 안내원은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못 타는 사람도 수두룩한데...!” 분위기를 띄운다. 홍도 항을 벗어난 유람선은 오른쪽, 동쪽에서 남쪽으로 해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관광이 홍도를 보는 80%다. 주 포인트는 출발하자 만나는 남문바위 부근으로 전속 사진사 2명이 포토존을 마련하여 사진촬영을 한다. 인화도 가능하다고 추켜세우는 걸로 보아 다년간의 경험으로 포인트와 그들만의 카메라 조작법에 능한 모양이다.
남문바위, 실금리 동굴, 거북바위, 만물상바위, 부부 탑, 석회굴 등 200여 개의 동굴이 있으며 이름이 있는 곳은 10개 남짓. 비경을 둘러보는 데는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이중 주 포인트는 먹는 것, 즉 선상에서 어부들이 직접 잡은 회를 즉석에서 먹는 것이다. 이제까지 못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먹어본 사람은 꼭 다시 찾을 만큼 맛있다는 회는 놀래미와 우럭이 주를 이룬 가운데 준비하기가 무섭게 팔려나간다. 덤으로 소주는 섬이라고 비싸지 않아 4천원이라며 사족처럼 붙이지만 이 또한 덩달아 불티가 난다. 이런 요란함을 겪는 가운데 갑자기 빗방울이 흩날린다.
기쁨도 잠시, 홍도 항에 다다르자 다시 숙소로 돌라가라는 통보를 받고는 무거운 발걸음이 경사진 길에 어지럽다. 베개와 이불로 머리를 받쳐 누운 얼굴 위로 깊은 침묵이 흐른다. 오전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간간이 창밖으로 향하는 눈길이 사슴의 눈을 닮았다. 오늘 이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오늘 돌아가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입을 꾹 다물어 계산이 한창인 모양이다. “에이 올 못가면 낼 가지 뭐! 하루 쉬자!”호기 있게 말을 하지만 여전히 속이 타는지 마름 침을 삼킨다.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에 비해 집착이 더 강해지는가 보다. 직장만 해도 그렇다. 결근은 커녕 지각이나 조퇴도 거의 없다. “사표 내면 되지”하는 젊은 사람들에 비해 미래에 대한 대안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직장을 그만두면 다음 직장을 다시 잡는다는 보장이 희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 당장 남아도는 시간도 문제다. 차츰 적응이야 되겠지만 마누라의 눈치를 보는 것도 만만찮다. 마음의 짐을 스스로 만들기에 더 힘든 시간의 연속이다.
"안 돼! 나는 오늘 꼭 가야돼! 목요일 날 청원휴가 냈단 말이야! 짤린다고!”하는 절박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우르르 쾅쾅 천둥이 운다. 곧이어 빗줄기가 굵어진다. 그날 그 시각 통영은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한참이나 쏟아졌다고 한다. 거의 절망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내려놓으면 후련하다고 포기를 마음먹자 오히려 평안해 졌는지 우스갯소리가 나오고 농담이 뒤를 따른다. “등산을 가는데 가스 불을 켰는지 껐는지! 비 오는 날 장독뚜껑을 닫았는지 열었는지! 아마 치매초기 인가봐. 볼펜을 손에 들고는 여기저기를 찾았지 뭐야!” 태연자약을 가장한 말들이 어지럽다.
“그보다도 왜 이런 날은 얼큰한 라면이 당길까? 슈퍼에 라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사자!”하는 말에 “그럼 어디다 끓이고!”하며 쓴웃음을 짓는 순간에 햇빛을 가리던 해무가 물러나고 깃대봉을 오르는 나무계단이 금방 세안을 마친 듯 말끔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윽고 근 1,000여 명의 관광객이 홍도 항에 모여들어 세찬바람에도 꿋꿋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 이 시간 흑산도에 있어야겠지만 누구하나 입에 담지 않는다. 단지 출발을 위해 홍도 항에 들어서는 배가 반가워 그간의 마음고생을 잊고는 손을 흔든다. 고맙다고!
결국 지리산 휴게소에서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고는 추억을 듬뿍 담은 절반의 1박2일을 마친다.
*홍도에 대한 소개는 인터넷 등등에 넘쳐나기에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