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의 산 증인 이헌영 고문②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의 산 증인 이헌영 고문②
  • 강효금 기자
  • 승인 2024.04.21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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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 1천 번 필사'에 도전하는 이헌영 고문. 그는 여전히 현역이요 청춘이다. 이원선 기자
'천자문 1천 번 필사'에 도전하는 이헌영 고문. 그는 여전한 현역이자 청춘이다. 이원선 기자

◆ 여전한 현역 ‘천자문 1천 번 쓰기'에 도전

담수회와 춘추회, 향교, 서원 등에서 활동하며 그는 지금도 성찰하고 배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 유림으로 성주, 안동, 문경, 예천, 영주, 청송, 상주, 경산 등 100여 곳 넘게 출입하며 유교 정신을 되살리고 일깨우는 데 노력했다. 담수회에서는 15년 정도 부회장을 맡았고 지금은 마지막 봉사로 ‘고문’을 맡고 있다.

88세에 구미 직장을 그만두면서 천자문 공부에 매달리게 되었다. 집에서 붓글씨로 직접 한 글자, 한 글자씩 쓰고 뜻을 새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에 오는 결산서며 공문의 이면지에 바둑판 모양을 그리고 연습했다. 그렇게 A4용지에 쓴 것이 500번이었다. 누군가 그걸 보고 오래 보관하려면 한지에 써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한지로 칸을 나누고 인쇄해서 묶고, 쓰기 시작한 것이 280번이다. 이제 총 780번. 연말이나 내년 중반에는 천자문을 1천 번 쓰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가 예안 이씨 충효당 종가를 관리해 온 지도 60~70년이 흘렀다. 특히 안동시 풍산읍 '체화정'은 보물 제2051호로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그가 받은 훈장은 새마을 훈장, 국민 포장, 국무총리상 등 100개가 넘는다.

◆ ‘병역명문가’ 3代가 현역으로 20년 넘게 복무

군대는 보병으로 있다가 경리병과 모집에 합격했다. 고향 면사무소에서 임시 서기를 맡아 글씨 연습과 주산을 배운 덕에 후방에서 근무했다. 경북 하양에 있는 육군경리학교 경리병과에 수료 후 원대 복귀하여, 7년을 근무 후 제대했다. 그의 집안은 아들 셋과 손자 셋 모두 현역으로 복무해서 가족 7명이 20년이 넘는 군대 생활로 병무청에서 ‘병역명문가’로 지정되었다. 6·25 참전용사로 참전명예수당으로 작년 기준으로 정부에서 매달 39만 원, 지자체에서 10만 원을 지원받고 있다.

“살아있는 참전용사 대부분이 90대인 걸 생각하면 목숨과 맞바꾼 대가로 너무 야속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구에 당시 입은 상처로 실제 생활하기 힘든 분이 있는 걸 생각한다면, 이 수당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금액으로 인상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지를 묶어 정성 들여 필사한 천자문. 흐트러짐 없는 글씨는 그의 고고한 인품을 말해 준다. 이원선 기자
한지를 묶어 정성 들여 필사한 천자문. 흐트러짐 없는 글씨는 그의 고고한 인품을 말해 준다. 이원선 기자

◆ 역사의 현장 ‘예안 이씨 충효당 종택’

보물 제553호로 지정된 충효당은 그가 지금껏 정성을 들이고 있는 역사적 가치가 담긴 건물이다. 자식들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는 자식들에게 16대 조가 충신으로 정려되고, 8대 조가 효자로 정려되어 충효당의 후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칭찬받는 사람이 돼라’고 가르쳐 왔다. 남에게 욕먹지 않고, 자식들 모두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는 지금도 충효당 종가를 방문하고 관리하기를 잊지 않는다. 빠짐없이 문중 회의에 참석하고 후손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법도 일러 준다. 종택은 임란 전에 지은 집으로 한국동란 때에는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지라 멀리 피난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식구들이 산속에 피난하는 동안 종택은 인민군 정보부대가 되었다. 또다시 인민군이 밀려가고 국군이 올라오자, 이번에는 한국군 정보부대의 거처로 변했다.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토지개혁을 발표하고 지주의 땅을 몰수한다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본 종택. 그는 그래서 더 종택이 마음이 가고 애가 쓰인다고 말한다.

그의 직장에서의 은퇴는 다른 사람들이 믿기 힘들 정도로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는 이만하면 되었다며 물러나려 했지만, 공단에 입주한 업체들이 그를 붙잡았다. 경리 출신으로 공장 장부도 처리하고 내 일처럼 살뜰하게 운영·관리했기에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입주자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로소 직장을 벗어났다. 섬유업체가 대다수를 차지하던 산단은 세월의 흐름에 밀려 전자제품과 자동차 부품, 반도체로 품목이 바뀌었다. 이제 섬유는 예닐곱 업체만 남아 그 화려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명맥만 잇고 있다.

그는 오늘도 정신을 가다듬어 천자문을 쓴다. 그의 글씨는 한 자, 한 자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글자가 없다. 마치 활자로 찍어놓은 듯 단정한 글자는 그의 인품을 잘 드러낸다.

“천자문을 쓰는 이유는 잡념이 사라지고 쓰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천 번을 쓰면 천자문의 그 정신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그의 묵직한 한 방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