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1)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8.17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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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께 못 이기는 척 복녀가 딸 노릇 해봐!” 부추긴다
고개를 숙여 걷는데 뜨거운 눈물이 눈가로 주렁주렁 속절없다
생각에 잠긴 복녀는 본능적으로 덕배 옷부터 떠올렸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저기~ 저기서 해바라기처럼 오매불망 복녀, 복녀~ 자네에게 목을 맨 행랑어멈의 선물도 있으니까 찬찬히 살펴보게!” 씩 웃는다.

“오매불망은 무슨? 그리고 행랑어멈이 무닥지 왜 제게 목을?” 의문으로 물었지만

“그야 나야 모르지! 아마 복녀 자네가 난리 통에 잃어버린 딸애만 같아 그런가 보지! 쉿~!” 중지로 입을 막아 조용하란 말에 끝에 사족처럼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일 점 혈육 없이 나날이 늙어만 가는데 얼마나 외롭고 적적하겠어! 제삿상은 언감생심으로 물 한 그릇 떠 놓을 이 하나 없다 보니 생의 허무랄까? 긍께 못 이기는 척 복녀가 말벗으로 곰살궂게 양딸 노릇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어리광도 부리고 효도라고 한번 해봐! 어차피 지금은 피장파장으로 사고무친 아닌가! 근께 좋은 게 좋다고 명절이면 찾아서 안부도 묻고 말이야!” 은근슬쩍 부러움 반에 장난삼아 옆구리에 간지럼을 태운다. 하지만 복녀는 마냥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저 생소한 ‘배불뚝이’란 말만 입으로 곱씹으며 양손으로 받아들고는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꺽쇠 어멈 말대로 행랑어멈이 옆으로 다가들더니

“자~ 복녀야 무겁겠다만 이~ 이것도, 별것이 아니네만 이것도 받게!” 보따리 하나를 눈앞으로 내미는데 복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꺽쇠 어미로부터 언질을 받았다지만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는다는 것 또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의 복녀다.

“아닙니다. 저~ 저~ 지는 염치없이 받을 수가 없는지라유! 이러시면 아니, 안 되는디유!” 다급하게 손사래다. 하지만 소용없다. 복녀가 온갖 구실을 붙여가며 사양해도 손윗사람이 주면 ‘고맙습니다’ 냉큼 받을 것이지 막무가내다. 행랑어멈의 고집도 덕배랑 엇비슷, 기어이 받아 들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전리품처럼 양손으로 들고는 자랑 겸 덕배부터 찾는다. 그나저나 이 비루먹을 아기 아비 덕배는 어디로 갔을까? 눈을 희번덕이며 살피는데 덕배는 저쪽 행랑채 앞에서 행랑아범과 무언가 심각하게 대화 중이다. 한데 이상한 것은 덕배가 그동안 죽고 못 산다던 담배를 입에 물어 피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간 덕배는 아래위를 몰라 누군가가 부를라치면 습관처럼 담배부터 찾았다. 나이 고하를 떠나 얼굴 가득 불만스러운 표정은 기본이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 행랑아범에게 고개를 숙여서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흡사 온순한 학동만 같다. 그것도 잠시, 곧장 지게에다 자루 몇 개와 보자기로 싼 함지박을 얹어 지고는 동바로 질끈 질러 맨다. 멀겋게 선 복녀를 보더니 씩웃고는 무심하게 대문으로 향한다. 쓰다 달다는 말 한마디 없이 소슬바람처럼 훌쩍 나간다. 대문에서 가뭇없이 사라지는 덕배의 뒷모습을 보는 복녀는 전후 사정을 떠나 야속한 감정부터 앞장이다. 비록 없는 정조차 끊어서 떠날 작정이지만 아직은 부부인데 저리도 매정할까 싶어 가슴으로 찬바람이 ‘쌩’하다. 하긴 그 성정(性情) 며칠이나 갈거나 싶었다. 문득 아랫배를 내려다보는 복녀는

“에~고 불쌍한 내 새끼~ 모진 부모를 만나서 기어이 세상 빛을 못 보고 가는구나!” 터덜터덜 걷는데 온갖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 맞아 이렇게 찬밥신세에 벌레 취급으로 살 바에는 오늘 저녁 단판을 짓자! 있는 대로 약을 올리자! 제 놈의 못된 성질머리에 온갖 부아를 돋우어 일삼아 매를 벌리라! 종래는 아랫배로 들이쳐 오는 매몰찬 발길질을 오지게 받으리라! 벌겋게 피를 쏟으며 두 눈을 하얗게 뒤집어 자빠지리라! 제 놈이 제 자식을 죽이는데 세상 그 누가 뭐랄까? 고개를 숙여 걷는데 뜨거운 눈물이 눈가로 주렁주렁 속절없다.

맥을 놓아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삽짝을 들어서는데 선뜻 부엌을 나서는 덕배다. 복녀를 보고는 헤벌쭉 웃는다. 면상을 확 긁어 주고 싶은데 겸연쩍다는 듯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도둑질을 들킨 모양으로 쑥스럽게 지나간다. 그새 짐을 다 풀었는지 짐짝처럼 내 버려진 지게가 앞산을 향해 한껏 입을 벌려 덩그런데 복녀는 자신의 신세만 같아 서글프기 그지없다.

차마 보기가 서러워서 한 눈으로 외면한 복녀가 급하게 부엌에 들어보니 쌀독으로는 쌀이 그득하고, 자루 자루에는 온갖 곡식들로 넘쳐난다. 보리쌀, 좁쌀, 콩, 기장쌀, 참깨, 팥 등이 가지런하다. 게다가 함지박을 싼 보자기를 풀자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의 온갖 양념이 오종종한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다. 웬만한 집안의 한 살림을 옮겨다 놓은 기분으로 마음이 든든하다. 흡사 없는 친정에서 어미를 졸라 다녀온 듯 모처럼 만에 사람 사는 부엌 같다. 그러고 보니 덕배는 이 모든 것을 받아 정리 정돈 차원에서 걸음을 재촉했던 모양이다. 복녀를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을 미리미리 쳐내려고 서두른 모양이다. 속으로 ‘쿡’ 웃는 복녀는 아랫배에 손을 얹어 혼잣말이다.

“아가야 내가 네 아비를 오해해도 단단히 했었나 보네!” 아랫배를 살살 두드리며 노란색이 오종종한 콩 자루를 보는데 일삼아 가슴이 뛴다. 가을 추수로 두어 줌의 콩을 볼 때 서너 종지의 콩자반으로 끝인가 싶어 한껏 아쉬웠는데 보는 것으로도 마음이 부자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아가는 복녀는 벌써 콩을 삶는 기분으로 허공을 붕붕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혹자는 메주콩 뜨는 냄새가 큼큼하여 싫다지만 복녀는 그 냄새가 진정으로 정겨웠다. 가마솥에다 장작불을 지펴 김이 오르면 커다란 주걱으로 저어가며 콩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을 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물컹하게 익은 콩을 돌확에 부어 성글게 찧어서는 낡아빠진 채에다 무명천을 받쳐 꼭꼭 밟아가며 동그랗게 틀을 잡아갈 때면 고된 줄도 몰랐다. 동서로 가로지른 들보에 서네 개의 못을 ‘탕탕’ 박아 올망졸망 걸어 놓으면 세상을 가진 기분으로 푸짐했다. 그것만으로도 온 겨울이 따뜻했다. 하얗게 곰팡이가 필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코를 내밀어 냄새를 음미했다. 톡톡 도드라진 콩알을 손톱으로 빼서 입안으로 굴릴 때면 이 세상에 없는 어머니의 품을 파는 듯 행복한 꿈길을 달렸다.

복녀가 저 혼자 행복에 겨운 나머지 상념에 담뿍 젖에 몽롱한데 어느결에 부엌으로 성큼 들어서는 덕배다. 그새 시냇가를 다녀왔는지 물지게 양옆으로 매달린 물통으로 넘치듯 물이 찰랑거린다. 이번에도 복녀가 뜨악한 표정으로 덕배를 쳐다보는데 물단지는 어느새 우둠지를 넘쳐서 그득하다. 이것도 행복이라면 행복인가? 무심히 부엌을 나서는 덕배의 넓은 등판을 보는 복녀는 갈팡질팡 정신줄을 놓는다.

“이 일을 어이할꼬? 이 일을 우째? 이 일을 나는 우찌하면 좋을꼬? 이라면 나는 어이하란 말인고?” 줄기차게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러다 문득 들고 온 보따리가 생각났다. 도대체 뭘 싸서 보냈기에 꺽쇠 어미가 선물이라 했을까? 조심스럽게 끌러보는 보따리 하나에는 지짐이 등의 간단한 음식과 자그마한 술병 하나가 들어앉아 배시시 앙증맞다. 다시 행랑어멈이 주는 보따리를 풀자 무명천을 비롯하여 색색의 옷감이 그득하다. 생각지도 못한 옷감을 대하는 복녀는 무람없이 생각에 잠겼다.

덕배는 물론이고 복녀 자신조차 입고 지내는 입성 중 옳은 것이 없다, 동네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워 그동안 삽짝 출입도 삼갔는데 이 정도의 옷감이라면 그럭저럭 옷 몇 벌은 지어 입을 만하다 여겼다. 그럼 누구 옷부터? 생각에 잠긴 복녀는 본능적으로 덕배 옷부터 떠올렸다. 남는 천으로 자신의 고쟁이를 생각하는 복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옷감도 좋고 새 옷도 다 좋다지만 이 마당에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그깟 바느질쯤이야 나날이 날밤을 새워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지만 나보고 진정 어떡하라고, 어찌하라고!” 중얼거리는 복녀는 뱃속 아이는 지우고 수시로 보따리를 싸는 이 년에게 진정 어찌하라고, 다들 어쩌라고 이런단 말인가? 줄줄이 이어지는 원망으로 어쩔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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