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78)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78)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7.27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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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의 그림자에 저승사자를 보는 듯 깜짝 놀란 복녀다
남들이 흉을 보든 말든 상관없다며 시냇가를 오간다.
칼부림을 일으킨 남편에 의해 부인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지난해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가만히 지켜보노라니 복녀의 가을걷이가 거지반을 넘겨서 얼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손바닥만치 빠듯한 텃밭치고는 갖가지 작물로 꽤 옹골찬 수확이다. 호박, 들깨, 콩 등, 그중 무는 죄다 뽑아 무청을 몽땅몽땅 잘라낸 뒤 한쪽으로 가지런하게 쌓았다. 무청은 시래기용으로 지푸라기로 묶어 처마 밑에다 주렁주렁 매달았다. 배추는 있는대로 거두어 뿌리를 몽땅몽땅 잘랐다. 그중 한 뿌리를 깎아 맛나게 씹는 복녀다. 한데 완장 찬 감시자일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덕배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덕배의 그림자에서 저승사자를 보는 듯 깜짝 놀 란 복녀의 겁먹은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다. 인삼을 먹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저럴까 싶다. 은근슬쩍 외면하며 옆을 살피는데 무를 채 썰어 오그락지(무말랭이를 고춧가루와 볶은 깨, 말린 고춧잎 따위를 넣고 찹쌀풀에 섞어 버무린 반찬)를 밑반찬으로 담으려나 보다. 무말랭이가 채반 위에서 꼬들꼬들 말라가고 있다. 옆으로 비켜 앉은 복녀가 절인 배추의 물기를 빼는 가운데 배추-짠지(‘배추김치’의 방언)를 담그려나! 고춧가루를 빨갛게 함지박에 쏟아붓고 있다. 한데 이때까지와는 달리 복녀의 행동이 지극히 부자연스럽다. 그 모습에 심히 마음이 불편한 덕배는 이 모두가 자신 때문이라 여겨 한발 비켜나 사방을 두루 살피더니 대뜸 삽을 잡는다. 잔소리도, 시키지도 않았건만 구덩이를 파기 시작이다.

처음 판 구덩이에는 무를 차곡차곡 묻었다. 짚단으로 입구를 만든 덕배가 기다란 막대기에 못을 거꾸로 박아 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해가 바뀌어 무 구덩이가 깊어질 때를 대비한 모양이다. 그런 다음 응달진 곳에다 두 번째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완성되자 단지를 깨끗이 씻고는 신문지에 불을 붙여 소독한다. 곁눈으로 흘끔 보는 복녀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얼치기 솜씨가 신기한 듯 절로 웃음이 난다. 단지를 불로 소독하다니! 그건 된장을 담글 때나 그렇지 지금은 짠지를 담을 건데, 속으로 웃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덕배는 여전히 저 혼자서 일에 묻혔다. 그런 다음 부엌을 들락날락 정신없다.

그러는 중에 덕배는 삶에 대한 허무에 젖는다. 세상을 향해 이유없는 불만을 표출하는 자, 모든 잘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자, 제 할 일은 찾아 하지않고 게으름만 피우는 자의 결실이 이처럼 초라한가 싶었다. 그간 나는 가족을 위해 무얼 했는가 싶어 스스로 우울하다. 쭉정이조차 건질 것이 없는 백수의 손을 무람없이 내려다보는데 그저 목을 졸라 죽고만 싶다. 그나마 생활력이 강한 복녀가 있어서 삼시 세끼로 풀죽이나마 때를 거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 모습이 며칠 전날에 비교해서 전혀 딴판이다. 자책으로 풀이 죽은 데다 병치레 끝이라 여전히 어지러운지 간혹 머리를 짚는 덕배는 집안을 휘둘러 시키지도 않은 일을 척척, 소가 된 게으름뱅이처럼 구슬땀이다. 그간의 게으름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잠시도 손을 쉬지 않는다. 사내대장부가 부엌에 들면 불알이 떨어진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지난날과는 달리 문설주에 손때가 내려앉도록 들락날락 분주하다.

부엌에서 연기라도 조금 오른다는 기미가 보이면 맵다며 손풍로가 재깍 등장이다. 커다란 함지박에 빨랫감을 오지게 담으면 무겁다며 시내까지 순식간에 운반한다. 남들이 흉을 보든 말든 상관없다며 시냇가를 오간다. 그 모습에 복녀는 이 인간이 뭘 알기나 알고 이러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싸고 푸는 보따리의 존재를 알기나 하고 이러는 걸까? 뱃속으로 자신의 씨가 든 것을 눈치챘을까? 그저 고개를 갸우뚱, 이런 정도의 호강이라면 떠나기 전까지 못 이기는 척 마냥 누리고 싶은 마음이 은근하다.

그러기를 며칠 지난 어느 날 복녀가 삽짝에 나와 섰다. 멍한 눈으로 신작로를 바라다보는데 동네 아낙네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여 지주댁으로 향한다. 그 뒤를 따라서 마냥 신이 난 동네 꼬마들이 올망졸망 장난질에 까불까불 날아다닌다.

“아~ 오늘이 지주댁에서 오라고 기별한 날이구나!” 혼잣말에 집안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만사를 잊은 듯 덕배는 저 홀로 흥에 겨워 우당탕 장작을 패고 있다. 제멋에 겨워 도끼를 하늘 높이 쳐들었다 기운차게 내리찍는다. 그 바람에 둘로 쪼개진 장작개비가 도끼날 아래 튕겨 나고 있다. 한참을 몽롱한 눈길로 쳐다보던 복녀가 공매를 작정으로 참고 참았던 입을 기어이 연다. 짐짓 지나가는 말투로

“저기 유! 저기 저~ 이봐유! 아마도 오늘이 그날인 갑는디유! 얼른얼른 갈 준비는 않고 시방 뭘 하남유! 장작일랑은 인자 고만치 패도 델거구만유! 아~ 아니 갈 거야유?”

“아~ 워디를?” 뜬금없이 뭔 소린가 쳐다보는데 복녀가 삽짝에 눈길을 고정으로

“아~ 워디기는 워디야유! 저기 저~ 쩌어기지 워디남유!”

“저~ 쩌기는 왜? 누가 있어서 반긴다고!”

“아~ 오라는 기별을 일삼아서 받았다면서유!”

“기별이야 진즉에 받았제만서도,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아~ 염치가 있지, 기별을 받았다고 일일이 다 가는감!” 일 없다는 듯 도끼만 줄기차게 휘둘려 내리찍는 덕배가 왠지 약속하다. 속으로 꼴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것이지 염치는 무슨 염치, 쥐뿔도 없는 게 자존심은 있어서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오늘로써 아쉽지만 달리 마음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꼴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려 방안으로 들어온 복녀의 눈으로 서글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한껏 심장이 상한지 방바닥에 가만히 몸을 붙인다. 양팔을 곱게 포개 머릿밑으로 고아 베고는 벽을 향해 나른하게 누웠는데 아랫배가 허전하다는 느낌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진즉에 약을 먹어 버릴 걸 그랬나 싶다. 행여 하는 심정으로, 한가락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던 자신이 미련스럽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가 다르다고 제 아비를 닮았다면 행실머리가 불한당으로 뻔하다며!” 해코지처럼 아랫배를 툭툭 치던 복녀가 급하게 부엌에 들러 무 한 조각을 깎아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는데 괜한 눈물이다. 다시 벽을 향해 돌아누워서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아가야 미안하구나! 그 많은 부잣집의 도련님을 마다하고 어쩌다 너는 내게로 왔더나? 너라고 오고 싶어 왔겠냐만 아비 어미를 잘 못 만난 탓에 네 목숨이 시시각각으로 경각에 달렸구나! 어느 아무개 어머니는 밑구멍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14년을 병구완에 기어이 살렸다는데, 부잣집에 시집을 보냈다는데, 이 어미는~ 못난 이 어미는~” 눈물을 삼키려는지 한참 동안 눈만 껌벅거리다가는

“그런데 행랑아범은 어째 오라 기별을 했을까?” 나를 알아서일까? 아니면 덕배 저 비루먹을 인간을 생각해 기별했을까? 우리네야 그렇지만 세상없는 부잣집에서 흔해 빠진 과일 몇 알을 벌충으로 불렸을 리는 없을 텐데! 도대체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벅이다가는
“어째 어미란 게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눈만 뜨면 살릴 생각은 없고 오롯이 죽일 궁리로 모진 마음을 먹는지 모르겠구나!” 다시 눈물을 훔치는지 가볍게 어깨를 들썩인다. 소맷자락을 시부저기 얼굴로 가져간다. 그렇게 서러움에 겨운 복녀의 눈에 벽지로 붙인 신문에서 기사 몇 줄이 눈앞으로 희미하다.

“부부싸움 중에 칼부림을 일으킨 남편에 의해 부인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후 알고 보니 부인은 임신 4주 차로 밝혀졌다” 더는 눈물이 앞을 가려 읽을 수가 없다. 어떻게 향후 자신의 처지랑 이처럼 똑 닮아 보일까?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반대로 돌아눕는데 애가 달아 지레(무슨 일이 채 일어나거나 어떤 때가 되기 전에 미리) 시르죽을 것만 같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복녀는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싶은데 꿈결을 따라 덕배의 목소리가 공중으로부터 아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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