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야스퍼스의 한계상황과 이순신 장군
(20) 야스퍼스의 한계상황과 이순신 장군
  • 김영조 기자
  • 승인 2019.07.16 14:3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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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더 강하게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근대 유럽사회는 이성 중심주의 사회였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고, 이성이 진리 판단의 기준이었다. 중세 신의 말씀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가치 기준이 바뀐 것이다. 이성에 의한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규범이 있고, 이에 복종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노예제, 여성차별,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예컨대,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해 이를 우리나라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논리를 앞세우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된다. 나아가 시장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상인들을 보호해주는 조폭들의 행위도, 상호간 합의에 의한 성매매행위도 이성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카를 야스퍼스  위키백과
카를 야스퍼스 위키백과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이성 중심주의를 반대한다. 이성으로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 중심주의는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일대 혼란을 겪게 된다. 전쟁에는 명분이 있다. 자국 및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빼앗긴 국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부당한 탄압에 저항하기 위하여 등이다.
2차 대전도 한 쪽에서는 해방과 국토 수호라는 명분의 전쟁이 자행되고, 반대쪽에서는 평화와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응전이 용인되었다. 모두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목적이고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수백만 명의 인류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과연 이러한 전쟁을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따라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것도 불완전한 사고와 가치와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느 순간 불완전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를 야스퍼스는 한계상황(또는 극한상황)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상황을 맞이하고, 상황변화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실존으로서의 인간은 상황 속에 있다. 보통의 상황은 변화시키거나 만들어갈 수 있다. 예컨대 파업으로 버스 운행이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타협에 의하여 파업을 해소하거나 버스 대신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외출을 자제하는 방법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이와 달리 한계상황은 우리 스스로 변화시킬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출생, 죽음, 고통, 다툼, 책망 등이 이에 속한다. 특히 죽음에 대해서는 언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등을 전혀 할 수 없는 절대적 한계상황이다.
이러한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기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한계상황에 굴복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나약한 방법이며, 비겁한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살이다. 우리나라 1일 자살자 수가 30명을 넘는 OECD 1위의 자살공화국이다. 치욕적인 사실이며 국가적 오명이다.
둘째는 한계상황에 맞서 이를 수용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아를 자각하고 참된 실존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죽음과 대결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의미 있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야스퍼스는 나치정부로부터 유대인 부인과 이혼하지 않으면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과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독일을 떠나라는 협박을 받았다. 그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부인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을 결심하는 실존적 결단을 내렸다. 동료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나치에 협력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이 된 것과 비교가 되는 사항이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더 강하게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가끔 자살의 경지에 이른 한계상황에서 전격적인 사고의 전환으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역사적 사실로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예에서 이러한 상황 변화를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입장에서 한계상황에 있었다. 선조대에 와서 동서분당의 당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백성들 몰래 도망을 가야 했다.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에 불을 지르고 형조에 보관하던 노비문서를 소각했다.
통치권이 마비되고 국가 사직이 무너지고 있었다. 관리들도 도성을 지키지 않았고, 임금의 몽진에 따라가지도 않았다. 전 국토와 만 백성이 적에게 유린당했다. 믿었던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대패했고, 마지막 보루인 원균의 수군마저 칠천량해전에서 궤멸하였다.
한계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권위보다 국가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백의종군의 이순신을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尙何言哉 尙何言哉, 상하언재 상하언재)......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지난번 너의 관직을 빼앗고, 너에게 벌을 준 것은 나의 부족함 때문이니 미안함에 할 말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절대 군주국가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계상황에서의 극단적 선택이고 엄청난 결단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 위키백과

 

이순신 장군도 한계상황에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였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겨우 수습하여 판옥선 12척을 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 배로 수백 척의 적의 전함과 싸운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좌절해 있지 않았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각오의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 묘책을 짜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물살이 빠른 울돌목을 선택하고, 100여척의 배를 위장 배치하고, 바다 밑에 쇠 그물을 치고, 학익진을 펼쳤다.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즉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신념을 불어넣었다.
이 상황에서 13척(처음 12척이었으나 나중에 1척이 추가됨)의 배로 10배가 넘는 적의 전선 133척(이밖에 수송선 200척)을 물리친 것이다. 아군의 배는 전혀 피해가 없고, 2명 사망, 2명 부상인데 반하여 적군은 전선 31척 격침, 92척 파손 및 대파, 10,000 명 이상의 사상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승리를 안겨 준 일본의 전쟁 영웅이다. 그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축하연에서 “나를 넬슨(Horatio Nelson ;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멸시킨 영국의 해군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나 이순신에게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면서 이순신을 가장 훌륭한 해군 장군으로 꼽았다.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한계상황에서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탄생되었고, 우리는 그를 성웅(聖雄)으로 승화시켰다. 해남 충무사에 있는 명랑대첩비에서는 6·25사변과 5·18민중항쟁과 같은 나라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 비석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나라를 걱정하는 성웅의 충절의 눈물일까?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

 

궁즉통(窮則通)이라는 말이 있다. 궁하면 곧 통한다. 극단의 상황에 이르면 도리어 해결할 방법이 생긴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우리나라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쳐지고 있다.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