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24)
녹슨 철모 (24)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9.0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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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별이 하나면 사단장이 되는데 박 준장은 큰 부대에 근무하는 탓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도 경력을 쌓아 고참이 되면 전방으로 나가 사단장이 될 것이다. 

군단은 전투 보병의 최상급 부대이다. 사단을 서너 개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군단 영내에 상주하는 병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군단 아래 부대인 사단장은 세 개의 연대를 거느리고 있으므로 그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 수는 매우 많다. 전방 사단의 경우 그 병력은 북한과 마주 보는 휴전선의 철조망을 지키는 연대 하나가 최전방에 있고 바로 그 뒤에는 이들 부대를 받치고 있는 연대가 있으며 맨 뒤에는 그들 부대를 받쳐주는 또 한 개의 예비연대가 있다. 그러므로 사단장이 되면 그의 힘은 막강하게 된다. 하지만 군단의 참모장은 아직 초보 장군에 지나지 않으므로 고참 참모들은 자신도 내일 모레면 진급하는 대령들이어서 내심 그 별을 크게 우러러보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참모장 역시 그렇게 거들먹거릴 생각도 없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은 저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끽소리 못해도 자신보다 낮은 계급에게는 굉장히 권위를 부리게 마련이다. 

군단 참모장 박 준장은 보병 특유의 장점과 단점을 다 갖추고 있지만 그런 식의 저속한 인간은 아니었다. 가끔 유치하고 우스꽝스런 행동을 자주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자주 했다. 그러나 신통하게도 그를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지혜롭지는 않아도 인간성이 좋기 때문이다. 우 대위와 참모장은 서울 나들이 이후 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어 부대를 한 바퀴 돌아볼 때면 가끔 의무실에도 일부러 들러 혈압도 재고 몸무게도 달아 보고 아는 체를 해주었다.

 

우 중위가 전방에서 근무한 그 1년이 남들의 3년 군대 생활보다 더 큰 고생을 한 것 같았다. 그의 전방 생활 1년 중 지붕이 있는 집에서 생활해본 것은 반년도 되지 않았다. 우선 부임하던 날부터 임진강변에서 숙영 생활이 시작되어 석 달 이상을 보냈고 가을 무렵에는 진지 보수공사를 한다며 또 전방에 나가 한 달 이상 숙영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대간첩 작전 나가고, 비상 걸리고, 훈련 나가고 이런저런 이유로 텐트 생활을 한 것을 합산해보니 대충 반년쯤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던 텐트생활은 임진강변 진지구축 작업 때였다. 

유월 중순부터 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여름을 거기서 보내게 되었는데 더위로 애를 먹었다. 야산에는 나무 한 그루 없었다. 아침 식사 때부터 땀을 흘렸다. 보병들은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공사 도구를 챙겨 들고 강변으로 나갔다. 위생병들도 한 명씩 중대를 따라 나가게 된다. 각 천막에는 중대별로 한 명씩 남아 막사를 지키고 전 부대원이 떠난 숙영지는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었다. 

우 대위도 처음에는 보병들과 함께 아침 식사 후 공사장으로 갔다. 공사장 가도 별다른 사고도 없고 응급환자도 생기지 않으니 가서도 할 일이 없었다. 보병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보병 장교들은 공사를 지휘하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군의관은 혼자 뒷짐을 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니노라니 마치 공사감독관처럼 보여 미안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조용한 곳을 찾아 혼자 앉아 있거나 남이 없는 강변을 거닐거나 했다. 임진강 다리 중에 ‘틸’교라는 미국 이름의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가 민통선이다. 즉 민간인은 물론이고 군인도 타 부대원은 이 다리 북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태원은 강둑에 하루 종일 혼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강변의 모든 게 신기하게만 보였다. 어떤 날은 기이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강 양쪽으로 우거진 나무나 풀들이 모두가 한국 전쟁 때 시체나 녹슨 탄피나 철모를 먹고 자란 괴물, 즉 나무와 겉모양은 흡사하지만 마치 무대에 나무를 흉내 내어 만들어 내어놓은 소도구들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그것들이 6·25 때 흘러내린 사람들의 피를 먹고 자란 나무들의 후손처럼 느껴져 지금도 사람의 피나 송장을 그리워하고 있는 괴물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여름 더위가 점점 기승을 부리면서는 낮에 강가를 거닐거나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아예 군복을 다 벗고 물속에 들어앉아 있기도 하였다. 물속에서 절벽을 쳐다보며 나중에 통일이 되면 여기 와서 술집이나 하나 차리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하기도 했다.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하는 공상도 해보고 강 건너 북쪽으로 계속 가면 북괴군이 있다는데 언제 한 번 가볼 수 없을까 하고 온갖 상상을 하며 물속에 앉아 있었다. 

가끔은 폭약이 터지며 날아오는 돌에 병사들이 다치기도 하고 또 공사 도중 연장에 몸을 상하는 사고도 있으므로 마냥 물속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통 폭약을 터트릴 때는 모두에게 알리고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경고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강가 절벽을 깨기 위해 폭약을 터트릴 때 강변에는 아무 은폐물이 없었다. 깨어진 돌이 하늘을 세게 날면 모두 그 돌을 쳐다보며 각자 알아서 피하는 수밖에 없다. 한 번은 폭약이 크게 터져 모든 부대원이 강으로 다 뛰어들 정도였는데 이때 몇몇 병사가 크게 다쳐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는 등 난리를 쳤으나 다행히 후송할 정도의 큰 부상자는 없었다. 

응급환자 외에는 전부 일과가 끝난 밤에 소대별로 인솔해서 환자가 오므로 의무실은 보병들과 일과가 반대이다. 이처럼 가끔 사고가 터지기도 하고 또 낮에 할 일이 없다고 군의관이 마냥 현장을 비워 둘 수만 없으니 눈치 봐가며 하루 몇 번씩은 공사장을 돌아보았다. 현장을 돌다 보면 방금 강에서 나왔는데도 또다시 전투복이 땀에 흠뻑 젖기 일쑤였다.

어느 날 이 상병과 친해지는 계기가 생겼다. 보병들이 공사를 위해 채취해놓은 자갈 무더기 위에서 이 상병이 더위도 잊은 듯 책을 읽고 있었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었다. 이 책은 두껍기도 하였지만 전방 사병이 공사장 자갈 더미에서 대낮에 읽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소설이다. 

태원이 웬 책이냐고 물었다. 입대 전 그가 제약회사 배달원으로 일하다 입대할 때 퇴직금 대신 받은 책이라는 것이다. 그는 원래 책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취미도 없어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아무 재미도 없지만 그의 피땀이 맺힌 책이므로 무조건 읽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이유로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그때 처음 알았고 그 후로도 더 본 일은 없다. 자신의 어린 사원이 군대에 간다면 저녁이라도 먹이고 퇴직금을 주고 정 형편이 안되면 돈 몇 푼이라도 쥐어 떠나보내는 게 인간의 도리일 것인데 정말 이런 사장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우 중위는 자신의 집안도 큰 공장을 하고 있어 군대 가는 직원들을 자주 봐왔지만 주인이 고용인의 돈을 떼어먹고 군대를 보내는 사람은 듣느니 처음이었다. 대개의 경우 주인들은 약간의 돈을 쥐어주며 격려해주는 게 상식이다. 

어떤 부자들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고 그 돈이 피 묻은 돈이든 코 묻은 돈이든 무조건 제 주머니에 모아 제 패거리나 피붙이들만 챙기는 사람도 있다. 군 입대도 부자나 권력자는 자신은 물론이요, 아들 손자도 군대에 보내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군대, 특히 전방부대는 힘없고 사연 많은 사람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다. 학력도 중졸, 국졸이 대부분이다. 부대에서 행정 요원으로 쓸 고졸이 없었다. 학교는 커녕 문전에도 못 가 본 사람도 꽤 있었다. 무학자들은 봄철에 사단에 한데 모아 한달 동안 한글 교육을 시킨 뒤 자대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까막눈 그대로인 채 귀대하였다. 사단가서 공부보다 모심기에 동원되고 사역만 실컷 하고 왔다고 불평하는 사병도 많았다. 그 중에는 간혹 한글을 읽게 된 사람들도 있었으니 일만 했다는 병사의 말을 과장된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태원의 위생병 중에는 사범대학 다니다가 데모한 죄로 입대한 사병이 있었는데 사단 무학자 한글 교육 때 강사로 갔다.

뜨거운 여름 더위도 밤이 되면 한풀 꺾였다. 숙영지가 산이어서인지 정말 신기할 정도로 밤에는 시원했다. 만약 낮 더위가 밤까지 계속되었더라면 대부분의 장병은 탈영하였을 것이다. 1인용 천막에서 우 중위는 촛불을 켜놓고 책도 보고 편지도 썼다. 도시에서만 자란 그로서는 별이 있는 밤하늘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그런 밤에 풀벌레 소리까지 끼어들면 황홀하였다. 그 순간은 그 후로도 잊혀지지 않는 행복한 밤이었다. 

이병주에게 편지를 썼다. 낮에는 병주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남들은 죽도록 굴을 파고 땀을 흘리는데 혼자 여자 생각이나 한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남자가 대낮에 여자나 그리워한다는 것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내들의 짓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태원이 여자들에 대한 감정이나 태도는 남들보다 독특했는데 그의 성장 과정과 관계가 있었다.

그가 자란 집에서 유일한 여성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공장의 일을 지휘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정답게 등을 두드려주는 그런 엄마는 아니었다. 더구나 동화책을 도란도란 읽어주는 그런 일들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집에서는 보통 20, 30명의 직원이 세 끼를 먹고 그중에 10여 명은 시골에서 와서 일했기 때문에 그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일을 하였다. 집안은 항상 전쟁터처럼 부산하였다. 사람들은 많이 들끓었지만 태원은 항상 외로웠다. 자연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와 책 읽기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교과서 외의 책 읽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였으므로 독서도 마치 나쁜 일 하는 것처럼 숨어서 하였다. 그의 독서는 누가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마구잡이식이었고 그러다 보니 한쪽으로 편향되는 독서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에 대한 그의 사고나 감정은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이었다. 그의 책에서 여자는 아름다운 여자, 애교가 넘치는 여자, 부드러운 여자, 따뜻한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그가 이병주를 좋아하는 점 역시 그녀의 밝은 미소와 따뜻한 마음씨였다. 항상 웃는 얼굴, 게다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웃을 때는 세상에 그보다 더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언제나 굳은 얼굴이던 지휘자형 엄마만 보아 오다가 부드럽고 잘 웃는 여자를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병주는 새로운 엄마였다.

태원은 밤 텐트 속에서 자주 편지를 썼다. 하지만 한 번도 그녀가 보고 싶다거나 그립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외롭다는 이야기도 쓰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약하게 보이는 남자는 이미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 저것 빼고 나니 편지는 항상 안부의 내용밖에 쓸 것이 없었다. 

답장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답장 편지 속 표현들은 전보다 대담하고 솔직해져 갔다. 그녀의 편지는 짧았으나 내용은 그의 가슴에 오랫동안 향기로 남았다. 

그녀는 역시 속내를 잘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든지 ‘항상 같이 있고 싶어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으면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거나 ‘당신의 품에 안기고 싶어요’라는 표현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