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의 어머니 친정은 양반으로 행세하며 재물도 있었는데 속아서 결혼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자연 그의 남편과는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큰 공장을 꾸려가느라 아들들을 그녀 뜻대로 양육할 겨를이 없었다. 아들들 스스로 공부하고 자라도록 두는 수밖에 없었다. 애들의 학교 성적이 떨어지면 가정교사를 데려다 가르쳤다. 그녀는 살림이 넉넉했어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절대로 고깃국을 끓이지 않았다. 계란도 아무 날이나 내놓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많은 공장 일꾼들과 모든 식구가 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는데 비싼 반찬을 할 수가 없었고 또 명분 없이는 호사스런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수시로 아들에게 '넌 성만 양반이야' 하고 혼잣말을 했는데 태원이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는 수십 년이 필요했다.
태원은 늘상 누나가 있었으면 했다. 따뜻한 누나, 부드러운 누나, 잘 웃는 누나가 필요했다. 동네에 태원보다 한 살 위인 연희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녀를 ‘미치코’라 불렀다. 이 연희가 태원이 원하는 조건을 다 갖춘 애였다. 연희네는 동네에서 태원네와 함께 가장 부유한 집이었다. 그래서 어른들끼리 왕래하였고 애들끼리도 친하게 지냈다. 연희는 아주 예쁘고 애교 있는 아이였다. 지금 성인이 된 태원도 아직까지 이보다 더 예쁜 여자는 본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연희는 태원에게 항상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태원도 물론 그 계집애가 좋았다. 예쁜 애들이 지닌 건방기도 전혀 없었고 성격도 사근사근하고 잘 웃었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흠은 그녀가 한 살 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태원의 비뚤어진 사고였다. 계집애가 얼굴만 예뻤지 공부는 못했다. 게다가 나이도 위였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남자애가 여자애와 어울려 이야기도 하고 웃고 놀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연희를 좋아하면서도 태원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들어 일부러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과 깔보는 마음, 그리고 잘 보이려는 마음과 밉보이려는 마음 때문에 태원의 마음은 복잡하고 자신도 짜증이 났다. 차라리 그 계집애가 빨리 어디로 이사를 갔으면 했다. 그는 항상 그녀를 건성으로 대하는 척했고 어떤 때는 일부러 짜증을 내고 화를 내었다. 한 번은 태원이 자기 집 옥상에 올라가 연희의 방으로 새총을 쏘았다. 성질이 난 연희가 후닥닥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태원이 보이는지라 의외로 하소연하듯이 낮은 목소리로 “태원아, 새총 쏘고 그러지마." 하고 문을 닫았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태원아, 새총 쏘지 말고 내려와 나에게 직접 말로 해’라는 모습 같기도 했다. 그때 태원이 새총을 쏠 게 아니라 연희와 다른 방법으로 관계를 만들었더라면 성장 후 태원의 운명은 또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연희는 길을 가면 남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나 태원은 그녀를 쳐다보기는커녕 항상 냉랭하니 그녀의 자존심이 더 이상 그에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던 중 어떤 대학생이 나타나 연희는 그와 사귀기 시작하였다. 태원은 자기 것을 빼앗긴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패배감과 배신감이 들었다. 그 패배를 자신의 탓으로 하지 못하고 연희가 나쁜 년이다, 배신했다 생각하며 오랜 동안 가슴앓이를 하였다. 이 사건이 태원의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그의 일생 동안 여자에 대한 편견에 또 하나의 조각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입대 후 처음으로 태원은 서울 나들이를 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탈영이었다. 문득 병주 생각이 나면서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대에는 사단의무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서울로 도망갔다. 불과 몇 달 되지도 않았지만 태원에게 서울은 이미 낯선 곳이 되어 있었다. 회사로 불쑥 찾아가니 병주가 깜짝 놀랐다. 이윽고 그 놀람은 병주의 가슴에서 행복으로 바뀌었다. 항상 이런 식의 돌출적이고 일방적인 행동이 그동안 병주를 많이 당황케 하고 때로는 실망하게 하던 것이었건만, 이번에는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졌다. 둘은 오랜만에 중앙청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걸었다. 병주는 대학 다닐 때 항상 불만 가득하고 긴장된 눈초리를 하고 다니던 태원이 입대 후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다니던 옛길을 다시 걷고 있으니 마치 처음 와보는 도시처럼 마냥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임진강의 ‘그날 밤’ 이후 이제는 어색한 감정도 없어지고 마냥 달콤한 연인으로 느껴졌다. 이들은 삼청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여관이 눈에 띄자 자신들도 모르게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병주는 그 전에 여관을 드나드는 남녀들을 보면 뭔가 칙칙하고 불결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대낮에 여관에 들어가면서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역시 태원은 서둘러대었다. 급하게 그녀를 누이고 안고 뒹굴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전반부가 생략된 소설처럼 행동하였다. 사랑이 최고로 무르익었을 때 마지막 행동이 육체의 결합일 텐데 태원은 항상 아무 표시도 없다가 갑자기 행동만 하였다. 그 나름대로는 행동의 전주가 있었겠지만 상대방은 항상 일방적 행동으로 느껴졌다. 병주는 이런 것이 원래 남자의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속내를 나타내지 않고 항상 그의 저돌적이고 거친 애정 표시겠거니 하고 다소곳이 따를 뿐이었다. 한편으론 이런 그의 행동이 그녀에 대한 강한 애정의 표시로 여겨져 쾌감도 따랐다.
부대는 가을이 되자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올가을 오랜만에 태원에게 ‘가을 병’이 찾아왔다. 그 병은 어떤 해는 심하게, 어떤 해에는 가볍게 찾아왔다. 해가 짧아지면 그는 우울해졌다. 대개는 의욕이 없어지고 기운이 없어지는 정도였지만 어떤 해는 심한 불안도 오고 때로는 죽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일에 몰두하노라면 그 증상들이 물러갔다. 바쁜 보병들을 보며 자신도 바빠져 보려 노력하였다. 어떤 중대는 피마자를 추수하여 화장품공장에 납품해 돈을 만들었다. 어떤 중대는 건초를 마련해 두었다가 목장업자에게 팔았다. 모두 이런 식으로 돈 벌기에 바빴다. 태원의 의무실도 그런 식의 부수입 궁리를 진작부터 해봤지만 그들의 신분상 특이성과 적은 인원수 등의 문제로 보병들과 같은 수입은 올릴 수가 없었다. 의무대는 대대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원 소속은 연대로서 대대에 파견을 나와 배속된 특수 신분이므로 그들의 땅이 따로 없다. 그리고 위생병들의 인원이 그런 과외 일을 할 만한 충분한 수가 되지도 못했다. 그들은 봉급도 연대에 가서 수령해 와야 하였고 이발도 연대에 들어가서 하였다. 각 보병 중대들이 나름대로 여윳돈을 마련하건만 의무대는 잡수입이 없었다. 태원은 자신이 전방을 떠나기 전에 텔레비전을 하나 마련해주고 떠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병들처럼 그럴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었다.
임진강 살 때 주워온 강아지가 이제 ‘보신’이란 이름의 어미 암캐가 되어 있었다. 이런 개 한 마리만 더 있으면 텔레비전은 안 되어도 라디오는 될 것 같았다. 태원은 강아지를 한 마리 더 사서 키우나 아니면 자신의 봉급을 보탤까 여러 궁리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태원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보신’이가 없어진 것이다. 사병들이 복날 잡아먹겠다고 이름을 보신으로 붙여 놓았다. 한 마리를 어떻게 더 구하느냐 하는 판에 그 한 마리마저 없어졌으니 태원의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라 어떻게든 보신을 찾겠다고 탐정이라도 된 듯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도둑은 부대 안에 있거나 아니면 옆 부대 군인일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위생병들을 풀어서 각 소대 내무반을 뒤지게 하고 쓰레기통에도 가보았다. 개털이라도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들은 서로의 개를 슬쩍하는 노련한 고수들이라 설사 부대 내에 범인이 있다 치더라도 쉽게 개를 찾을 수는 없을 터였다.
거의 포기하고 지내던 중 하늘에서 복음이 들려왔다. 의무대 보신이가 3대대에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2대대 통신병들이 전선 고장 수리를 하러 나가 전봇대에서 내려다보니 보신이가 거기 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전선을 이어 의무대로 전화를 해주었다. 이는 하늘의 통신병들이 땅 위의 위생병에게 전해준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태원은 가장 덩치가 큰 김철수 병장을 데리고 3대대로 갔다. 정문 보초병이 귀띔을 미리 한 탓인지 통신병들이 지적해준 내무반에 갔으나 보신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놈들은 보병도 아닌 군의관이 개를 찾으러 왔다니까 싱글거리며 시치미를 뗐다.
“무슨 말씀이세요?”
“딴 데 가서 알아보시죠.”
수군수군하는 놈, 킥킥 웃는 놈 여러 가지로 그를 놀려대었다. 태원은 이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보신이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참 찾아도 보신이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남의 부대 와서 개망신하고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식은땀이 등 뒤로 흘렀다. 마지막으로 그는 벼랑 끝 전술을 써 보았다.
"보신아! 보신아!”
태원이 큰 소리로 불렀다. 떠들던 놈들이 조용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한번 보신아 하고 부르며 돌아서는데 어디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좁은 내무반 침상 아래서 보신이가 안간힘을 쓰며 기어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이건 개가 아니고 뭐야?"
태원이 고함을 치자 놈들은 약간 기가 죽었지만 그 중에 뻔뻔스런 놈은 이렇게 속을 긁었다.
“군의관님, 그동안 우리가 키운 공은 안 주고 가세요?"
보신이를 훔쳐간 사병들은 끝까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그의 등 뒤에서 지껄여대고 있었다.
태원은 부대로 돌아오자마자 위생병을 시켜 인근 면 소재지 장날에 개를 팔러 보냈다. 민간인은 시중 시세의 반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다. 군인들을 얕보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음 장날 선임하사에게 민간인 복장을 시켜 보내 개를 팔았다. 그 돈에다 태원 자신의 돈을 약간 보태어 결국 라디오를 하나 샀다. 그 라디오를 보고 공병우는 제가 구두 밑창 날리며 갖고 왔다며 자신의 공로를 치켜세웠고, 선임하사는 자신이 물건의 제값을 받은 덕이라며 서로들 공치사가 한창이었다. 개 한 마리가 라디오로 환생하여 내무반에 자리하니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보신이가 라디오로 변한 듯 묘한 착각이 들었다. 이제 밤에 라디오로 드라마를 들으러 남의 내무반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