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해 만큼 12월은 짧고 바쁘기만 하다. 삼한사미(三寒四微), ‘사흘은 춥고, 나흘은 미세먼지’라고 하는데, 오랜만의 화창한 날씨에 팔공산(八公山)이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전세 버스에 올라 대구광주고속도로를 타고 동고령 IC를 나와서, 고령 읍내를 통과하여 대가야박물관에 도착하였다.
고령(高靈)은 삼한(三韓) 시대에 변한(弁韓)에 속한 반로국(半路國)이었다. 이 지역은 기후와 지리적 조건이 벼농사에 아주 적합하고, 질 좋은 점토와 철광석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토기와 철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가야국의 건국에는 금관가야의 김수로(金首露)왕과 가야산(伽倻山) 산신인 정견모주(政見母主)에 의한 두 가지 신화가 있다. 6세기 이후부터 금관가야가 쇠퇴하면서 고령 지역은 대가야의 도읍으로서 번성하였으나, 대가야가 망하면서(562년), 신라에 병합되어 대가야군, 고령군으로 바뀌었으며, 고령읍은 최근에 대가야읍(大伽倻邑)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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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 문화(殉葬 文化, 껴묻이)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왕릉전시관, 대가야역사관, 우륵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1978년도에 발굴된 지산동 44호 고분의 내부를 복원하여 출토된 부장품들과 같이 전시해 놓았다. 이 고분은 대가야읍을 감싸고 있는 주산(主山, 310m) 정상의 바로 뒷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내부에는 중앙에 으뜸돌방(주석실, 主石室)과 2기의 딸린돌방(부석실, 副石室), 그리고 주위에 작은 돌덧널(석곽, 石槨) 32기가 배치되고 이를 타원형으로 둘레돌(호석, 護石)이 둘러싼 다곽분(多廓墳)이다. 순장자는 각각의 돌방에 2명, 혹은 1명 이상씩 모두 40 명이상이 순장되어 있는 국내의 최대 규모이다.
순장(殉葬, 껴묻이)은 사후에도 생전의 삶이 그대로 지속된다는 계세(繼世)사상에서 비롯된 문화로서, 신분과 계층이 엄격한 고대 부족 사회에서 성행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부여(夫餘)에서는 산사람을 100여 명씩 죽여서 순장한다.’는 기록이 있다. 대가야의 순장묘는 으뜸돌방 외에 별도의 순장덧널을 따로 만들어서 매장하는데, 지산동 44호 고분은 순장덧널이 32기가 있는 국내에서 가장 큰 다곽식 순장묘이다.
순장 문화는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사람과 동물 모양의 토용(土俑)으로 대신하는 문화로 개선되어 가는데, 오랫동안 지속된 가야의 순장 문화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데 큰 족쇄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는 지증왕 때 이미 순장을 금지시킨 기록(삼국사기, 三國史記)이 있다.
긴목항아리와 굽다리접시와 같은 껴묻거리(부장품, 副葬品) 토기들은 조형미가 뛰어나고, 마치 유약을 바른 듯 윤기가 있었다. 대가야의 토기들은 백두대간을 넘어 장수, 남원 등지와 섬진강 어귀의 하동과 광양 지역의 고분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의 큐슈와 오사카, 히메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또한 화려하고 섬세한 무구(武具)와 말장식, 상감환두대도(銀象嵌環頭大刀)와 오끼나와에서 나는 야광조개국자도 출토되었다. 대가야의 철제 마구는 말의 산지로 유명한 일본의 군마(群馬)현에서도 발견되었다. 벼와 복숭아 씨앗, 물고기와 닭고기 뼈와, 바다 생물과 조개류 등이 토기에서 발견되어 대가야의 풍부한 먹거리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479년 대가야의 하지왕은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받았다고 는 기록이 있어, 당시 대가야의 활발한 대외 교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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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于勒)과 가야금(伽倻琴)
우륵은 성열현(省熱縣, 의령) 사람으로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서 중국의 악기인 쟁(箏)을 본따서 가야금을 만들고, 가야 고을들의 소리를 대변하는 12 악곡을 짓고, 연주를 하였다. 이후 신라로 망명하여 진흥왕의 신하들에게 가야금과 노래, 춤을 전수하였다. 말년에 우륵은 국원(國原, 충주)으로 보내졌는데, 우륵이 향수에 젖어서 가야금을 연주한 곳을 탄금대(彈琴臺)라고 불렀다.
우륵박물관은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만들어 연구한 곳인 대가야읍 쾌빈리 에 있다. 원래는 우륵이 가야금을 퉁기니 산골에 그 소리가 정정하게 울렸다고 해서 정정(丁丁)골로 부르던 곳이다. 박물관에서는 악성 우륵과 가야금에 관련된 자료를 발굴,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가야금과 전통악기에 관한 모형들을 관람할 수 있고, 직접 가야금 제작 체험도 할 수 있다.
가야금은 좁고 긴 오동나무로 된 울림통에 명주실로 꼰 12개의 줄을 매는데, 가장 굵은 현이 명주 생사 114올, 가는 줄은 54올을 꼬아서 만든다. 이로 보아서 대가야는 양잠과 제사 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원형이 남아있지 않은 12현 가야금이 일본 황실의 보물을 보관해놓은 정창원(正倉院)에 보존되어 있다. 한편, 우륵은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조선 시대의 박연(朴淵)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힌다.
낙동강(洛東江)은 강원도 태백의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경북 봉화와 안동을 돌아서, 선산, 고령으로 남하하다가, 창녕에서 남강(南江)을 흡수하여 김해평야를 적시고 남해로 빠져 나간다. 낙동강은 가야국들의 연결 고리이며, 해상 교역로이고, 천혜의 방어망이었다. 가야와 신라는 이 강을 사이에 두고 각축하였으나, 금관가야가 쓰러지면서, 대가야도 신라 이사부(異斯夫) 장군에게 패하여 멸망하게 된다.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곳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않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사림파(士林派)의 고장이 된다. 그리고 암흑의 세월이 도래하여, 후일 대한민국 천년의 기틀을 마련한 위인들이 여기서 배출된 것은 역사의 우연인가, 필연인가?
겨울 해를 등지고 돌아서는 나그네에게 화답(和答)하듯, 강물이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