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노트] 조금은 느긋하게 다녀도 좋을 포르투갈의 도시들
[여행노트] 조금은 느긋하게 다녀도 좋을 포르투갈의 도시들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3.01.3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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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마 지구에서 내려다 본 리스본.
알파마 지구에서 내려다 본 리스본. 강지윤 기자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도시가, 어느 지역이 마음에 훅 들어오는 순간 그 이름은 마음에 새겨져 떠나지 않는다. ‘포르투갈’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골목의 낡은 벽과 비탈의 계단. 오래된 식당의 흐린 불빛. 도시 곳곳에 배인 애잔함. 낡고 누추해 보이는 거리지만 품위를 잃지 않아 충만해 보이는 그 무엇, 그걸 찾아 떠났다.

포르투갈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수도인 리스본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 태주강이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는 지점에 있는 도시가 리스본이다. 1천km나 되는 긴 태주강이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에서 발원하여 포르투갈을 흐른 다음, 리스본에서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오래된 도시를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여유가 필요하다. 리스본은 한때 이슬람의 일부였다가, 15세기 지중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무역 요충지로써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때 벌어들인 막대한 부는, 당시의 국왕 ‘마뉴엘1세’가 국력을 자랑하며 지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는 원동력이 되었다. 1755년 강력한 지진과 쓰나미는 시민의 1/3을 앗아갔고 유서 깊은 건물을 파괴했다. 아픔을 딛고, 당시 수상이던 ‘폼발후작’의 도시재건계획에 따라 리스본은 현대 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구시가지를 오래된 트램을 타고 오르내린다. 느릿느릿 가는 길에 내밀한 아름다움을 만난다.

-벨렝탑과 발견 기념비

‘마누엘1세’가 ‘바스코 다 가마‘의 동방원정을 기념해 테주강 위에 탑을 세웠다. 강의 수위가 낮아진 탑 주위에는 나들이 온 가족의 물놀이가 한창이다. 벨렝탑에서 강변을 따라 내려가면 ‘발견 기념탑’이 보인다.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역사적 인물들이 범선에 타고 있는 모습이 오밀조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시대를 이끌었던 영웅들이 결연하게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모습 위로 그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머릿결을 스친다. 그만하면 되었다고. 그대들 이제 편히 쉬라는 듯이.

제로니무스 수도원. 전면 길이가 3백m가 넘는 건물 앞에 서면 미소한 인간임을 느끼며 겸허해진다. 수도원 안쪽은 야자수 모양의 천정과 수초와 조개껍질, 밧줄 같은 항해 도구를 새겨놓은 기둥이 눈길을 끈다. 강지윤 기자
제로니무스 수도원. 전면 길이가 3백m가 넘는 건물 앞에 서면 미소한 인간임을 느끼며 겸허해진다. 수도원 안쪽은 야자수 모양의 천정과 수초와 조개껍질, 밧줄 같은 항해 도구를 새겨놓은 기둥이 눈길을 끈다. 강지윤 기자

-제로니무스 수도원

저 멀리 물러나지 않고는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는, 건물의 가로 길이만 3백m가 넘는 위엄에 압도된다. 대항해시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으로 향신료 무역을 통해 포르투갈은 유럽의 일등국가가 된다. 국왕 ‘마누엘1세’는 이를 기념해 약 백년에 걸쳐 기념비적인 수도원을 지었다. 향신료에 부과된 세금이 공사대금이 된 셈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야자수처럼 생긴 기둥과 정교한 천정, 항해를 상징하는 밧줄, 조개껍질, 수초 등 마누엘 양식의 절정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제로니무스는 준공 당시 반은 수도원이자 성당이며, 나머지 반은 왕을 위한 공간이었다. 수도원 내부 성당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시인 ‘루이스 바스 데 카몽이스’의 석묘가 안치돼 있다.

-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리스본은 대서양을 배경으로 곳곳에 그림책을 펼쳐놓은 듯 붉은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1755년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오래된 알파마와 새롭게 만들어진 신시가지가 공존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알파마 지구는 리스본 중에서도 오래된 골목의 모습이 가장 잘 볼 수 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벼룩시장에서 문지르면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튀어나올 것 같은 오래된 램프나 고풍스런 거울, 고색창연한 회중시계, 운이 좋으면 오래된 건물 벽에서 떼어낸 아줄레주(채색타일)도 만난다. 하지만 지나친 흥정은 금물. 밀당하듯 재미로라도 지나치게 가격을 후려치면 자존심 강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불쾌해 한다. 트램은 여행자들의 발이 되어 언덕길을 오른다.

카보라로카(호카곶). 오른쪽으로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유럽대륙의 서쪽 끝에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그 비문에는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라는 ‘카몽이스’의 글귀가 새져져 있다.
카보라로카(호카곶). 오른쪽으로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유럽대륙의 서쪽 끝에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그 비문에는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라는 ‘카몽이스’의 글귀가 새져져 있다.

 

포르투갈의 대표 음악 ‘파두’

검정 드레스를 입은 가수가 어둠 속으로 등장하고 기타라 반주에 맞춰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길게 끌리는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녀가 부르는 파두를 들으면 문득 ‘숙명’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남편과 자식을 바다로 떠나보내고 그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수많은 그녀들의 탄식이, 끈적한 한(恨)이 되어 듣는 이의 가슴에 파고든다. ‘아멜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에서는 향수와 동경, 슬픔과 절절한 외로움이 묻어났다.

‘파두’에 대한 이런 상상과 기대로 예약한 식당에서 마주한 파두는 기대와는 살짝 달랐다. 두 사람의 기타 반주에 맞춰 카페의 주인이자 파디스트인 남성이 나와서 부르는 유쾌한 파두. 이런 달콤한 사랑의 세레나데 형식의 파두를 ‘코임브라 파두’라고 부른다. 젊은 여성 파디스트가 부르는 노래 또한 그리 무겁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연주하는 나이든 두 악사의 연주만이 가슴 밑바닥을 훑고 포물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우리의 K팝처럼 파두도 시대에 맞춰 음악을 즐기는 젊은 세대의 정서와 어우러지며 변화하고 있었다. 나이 들어서 우연히 첫사랑을 만난 듯한 설렘은 나만의 감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