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2)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2)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8.2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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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놈의 밴댕이 소갈머리처럼 모난 버릇의 재현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옹이처럼 파서 낼 수도 그 무엇으로 감출 수도 덮을 수도 없잖는가?
처음이야 어쨌든 무던하고 음전한 새아가를 복덩이처럼 맞아들인 일이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문득 갈대의 삶(生)이 생각났다. 뿌리를 엉기성기 옹골차게 부여잡아 기대어가는 갈대가 부러웠다. 이웃끼리 마음을 주고 받아가며 생각하고 살든 마음이 흔들리든 말든 천 년의 바위처럼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엉킨 그들의 일생이 가슴속으로 푸르다. 시장통에서 양아치로 밥을 빌어먹을 때도 몸은 부평초일지언정 뿌리만은 갈대만 같다 여겼다. 그 지독하다던 남사당패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처럼 흔들리지 않은 굳건함 삶이 태산만 같았다. 한데 지금의 나는 왜 이럴까? 갈대 뿌리만 같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몽땅몽땅 끊어져 저 허공으로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다. 악착같이 살아보고자 지푸라기라도 움켜쥐려 용썼는데 어느새 허허 빈손이다.

그나저나 크나큰 이 은혜를, 이 생애에서 어이 하여 다 갚을 수가 있을꼬, 생각에 잠겼던 복녀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바가지에다 쌀을 푼다. 실로 오랜만에 새하얀 쌀을 보자 견물생심이라고 이밥을 지어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복녀다. 물 한 바가지를 퍼서는 텁텁하게 갈라져 가는 목을 축인 뒤 소록소록 물을 붓는다. 살랑살랑 조리로 일군 다음 조물조물 씻는데 날아가는 기분이다. 흩어져가는 행복은 가뭇없고 단칸방서 신혼을 꿈꾸는 새색시적만 같아 얼굴로 생기가 올라붙어 발그레하다.

저녁을 맞아 개다리소반 펴는데 어제와는 달리 진정한 밥상 같아서 손길이 팔랑개비다. 먼저 하얗게 김이 오르는 쌀밥 두 그릇을 폈다. 다음으로 참기름을 두어 방울 노랗게 떨어뜨린 뭇국도 두 그릇 떠서는 상위로 마주하여 올린다. 양념간장 한 종지를 상 중앙으로 낮에 얻어온 부추전에 명태전을 주섬주섬 올리는데 눈치 없는 개다리소반이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그 모습에 눈앞이 아찔하다. 흡사 덕배 놈의 밴댕이 소갈머리처럼 모난 버릇의 재현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오냐 그래 다 부서져라! 부서져!’ 악담을 속으로 삼켜 실눈을 뜨며

“그래요~ 때릴 일이 있으며 그 말발굽 같은 모진 발길로 아랫배나 오지게 차 주셔유!” 지옥을 생각으로 넌지시 건너다보는데 덕배는 그저 흰소리인 듯 딴전이다.

“이놈의 밥상이 오늘따라 왜 이러나! 내일은 만사를 제쳐 손을 보기는 봐야겠구먼!” 태연자약하게 수저를 든다. 잔뜩 기가 죽고 겁에 질린 복녀를 보고는 이 모두가 내 죄라는 듯 어서 수저 들기를 재촉하는 듯하다. 한바탕 회오리가 의외로 수월하게 넘어가자 복녀가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렇더라도 마음을 바꾸어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들려오는 옛이야기에 따르면 씨받이의 끝은 없어도 씨내리 끝은 있다고 하질 않았는가? 그것도 눈이 파지고 음부가 난자당해서 죽었다질 않는가? 그런 이치로 따진다면 덕배 저 인간은 인간도 또 사내도 아니라는 게 결론이다.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차후가 더 문제란 생각에 복녀는 철석간장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씨내리인 양 여겨 수시로 양아버지를 들먹거리는 데는 어쩔 수가 없어 희망이 절벽이다. 결국에 부부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으로 스스로 내린 답이다. 한데 근자에 이르러 며칠간을 겪는데 달라진 덕배의 모습에 쉽사리 단정 지을 수가 없다. 그저 오지게 아랫배만 차 준다면, 그리만 된다면!

진정한 마음일까? 아니면 속마음과는 다를까? 그저 무람없이 바랄 뿐인데 복녀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겹쳐서 아랫배 위에다 철갑 방어다.

그즈음 행랑어멈은 마님의 무릎 앞에 머리를 조아려 꿇어 엎드렸다. 동네 아이들을 위해 별도로 상을 차린 일에 대해 이실직고, 대죄를 청하고 있었다. 보따리를 싸라면 당장에 나가겠다며 찐득한 눈물이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용히 행랑어멈의 말을 경청하던 마님이

“이보게 자네가 오늘은 관세음보살이 다 되었네그려! 그 일에 대죄를 청할 이는 바로 날쎄! 어째 그만 일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리고 보니 나는 지금껏 나이를 헛먹은 게야! 거꾸로 먹었어!” 자책하는 마님이다. 나아가 행랑어멈이 아이들을 위해 별도로 상을 본 일을 두고 잘했으면 잘했지 결단코 잘못한 일이 아니라며 칭찬이 뒤를 따랐을 뿐이다. 부부가 보따리를 싸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풀이 잔뜩 죽은 행랑어멈의 모습에 마님이

“이보게 어깨 좀 펴게 그리고 아~ 이 사람아! 이제 자네는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라네!”

“그렇더라도 마님의 허락도 없이!”

“허락은 무슨 허락을, 누구에게 허락을? 나에게 허락을? 사람하고는!” 다정하게 손을 잡으며

“선은 아무리 크다 해도 크다며 입 밖으로 말을 못 하고, 악은 아무리 작다 해도 작단 말을 못 하잖는가! 사람의 일생을 들어서 좋은 일에만 몰두하다가도 까딱 잘못하여 한가지라도 악을 행하면 마음속의 옹이처럼, 땅을 파듯 파서는 꺼낼 수도, 엄이도령(掩耳盜鈴)이라고 내 귀에 아니 들리면 다인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그 무엇으로 감출 수도, 덮을 수도 없잖는가? 그런데 나를 보게! 지금에 이 모습이 다 무어란 말인가? 이게 어디 형상만 사람이지 악의 화신이 아닌가?” 한숨을 깊게 쉬더니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후회되는 점은 멀쩡한 가족을 풍비박산으로 몰살(沒殺)하다 시피한 것에도 모자라 ‘인애’ 아버지를 배신하여 버린 것이라네! 죽음으로 내몬 것이라네! 그저 평범한 삶으로 농투성이 아녀자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왜? 나는 왜? 왜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겠네! 부귀영화에 욕심을 부리는 것에도 모자라 무슨 시샘에 애정으로 미련이 그리도 많았는지! 그 결과 나는 오늘날에 이르러 이렇게 괴물로 변해버리질 않았는가! 지금도 인애, 그 여리고 가여운 아이의 구만리 같은 청춘이 눈에 밟힌다네!, 청상과부에, 아비 얼굴도 모르게 태어난 유복자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네! 모든 탐욕은 삿된 마음으로부터 온다는데 후회스럽네! ‘인생이 별건가 뭐 다 그렇지 살지!’ 그렇게 위안이라지만 아닐세! 내 지금에 이르러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다네! 그러던 차 뒤늦게나마 깨달은 바가 있어서 매일 같이 관세음보살을 암송하는데 인생살이가 그저 한 조각 뜬구름만 같네!” 은근히 행랑어멈을 바라다보더니

“저 많은 재물이 다 무어란 말인가? 정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곤 죽는 날까지 반 종지의 잡곡밥에 나물 소찬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전부가 아니든가? 그조차 분에 겨워 없으면 또 어떠한가?” 한숨 끝에 행랑어멈을 보고 조용히 웃더니

“나도 말이지 여느 사람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났다네! 한데 지금에 이르러보니 못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통 물만 흐린 듯싶네! 결국에는 등 짝을 붙일 한 평 남짓한 땅뙈기에 이승에서 덤으로 얻어 입는, 자네가 그간의 인정으로써 베풀어주는 수의 한 벌과 저승길에 요기나 하라며 입으로 넣어주는 한 숟갈의 쌀과 노자에 쓰라는 엽전 한 닢이 전부가 아니겠는가? 그런 마당에 배곯은 동네 아이들의, 내 손자 손녀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그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좀 채워주겠다는데 내게 뭔 허락을 받는단 말인가? 아니 그러한가? 그리고 보면 내 생애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첫째로는 처음이야 어찌 되었든 무던하고 음전한 새아가를 복덩이처럼 맞아들인 일이고, 그다음의 행운이란, 지금에야 밝히네만 관세음보살님의 인도로 자네 부부와 인연을 맺은 일이라네!” 눈물을 글썽인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고모의 의견에 따라 대대적인 창고 정리가 있었다. 그동안 마음을 다잡아 날밤을 지새운 듯 일에 파묻혔던 덕배도, 복녀도 새벽밥 뜨기가 무섭게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지난날처럼 입씨름으로 따따부따 따질 수가 없는지라 앞뒤로 나란히 삽짝 행이다. 그때 지게를 지고서 앞장을 선 덕배의 뒤따르는 복녀는 이상야릇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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