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일본이 강제로 누적시킨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우리 민족의 사회운동이자 경제운동이었으며 투철한 독립운동의 불꽃이었다. 그 후 기미년(1919)에 3·1운동(三一運動), 즉 우리 민족의 거국적인 독립 항쟁이 일어났다.
기미년(1919) 3월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항일 민족항쟁,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며 4월 말까지 이어졌다. 이 항쟁은 연 1천500회의 시위에 총 200여만 명이 참가하면서 사망자 7천509명, 부상자 1만 6천명이 이르렀고, 4만 6,900명이 채포된 비극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일본 경찰과 헌병관서 습격 159회, 일반관서 습격 120회에 이르렀고, 일본관헌 사망자도 166명에 달했다고 한다.(한겨레신문; 2016.02.24.)
상세한 설명이 없어도,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기미년 ‘3·1조선독립만세 항거’는 그 성격이 다르다. 후자에 ‘운동’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것이다. 이 오류는 식민사관에 머물렀던 역사학자들이 부끄러운 행적의 결과였고, 오늘날까지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항쟁(抗爭)’이라는 단어는 ‘대항하여 싸움’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거리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노도와 같은 함성,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군인들과 충돌, 몽둥이와 칼로 내려치는 장면과 총기 난사로 쓰러지는 사람들과 핏빛으로 물든 거리, 싸늘한 시신과 처절한 통곡’, 등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연상의미’가 들어 있다. 이는 ‘항쟁’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생동하는 힘, 에너지이다. 일제의 눈치를 살피며 ‘독립항쟁’을 ‘독립운동’으로 바꾸었던 언어 변용, 또는 조작을, 그런 언론을 ‘언어 마사지’ 라고 희화하고 있다.
‘언어는 사용이다.’ 언어는 사용에 의해서 ‘생성, 변화, 소멸’을 거듭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단순히 대상이나 사실을 표현할 뿐 아니라, 여러 목적이 포함되는 도구가 된다. 독립항쟁이 독립운동으로 변화된 것도 어떤 암묵적 목적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된 ‘민주화 항쟁’이 ‘5·18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된 배경에도 사용자들의 목적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다음의 실례에서 알 수 있다. ①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 사건이었던 ‘부마민주항쟁’과 ② 1987년 6월 10일을 정점으로 20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위였던 ‘6·10민주항쟁’은 ‘운동’이 아니라 ‘항쟁’이라 한다. ①부마민주‘항쟁’과 ②6·10민주‘항쟁’은 물론 518민주화‘운동’, 세 가지 역사적인 사건들은 모두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은 ‘항쟁’과 ‘운동’으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그 차이점은 언어 사용 목적의 포함 여부이다. 전자의 두 가지 ‘항쟁’은 순수한 어휘 의미이고 후자의 한 가지 ‘운동’은 사용자의 목적이 들어가서 변형된 것이다.
언어는 사용자의 사용 목적에 따라 ‘생성, 변화, 소멸’의 과정을 거듭한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 이와 멀어지게 한다. 특히 이념 대결의 시대에는 단어의 순수 의미보다 사용자의 목적 추구가 우선이니 시대의 혼란은 곧 언어 사용의 혼란이며 목적 추구의 전쟁이다.
오늘 뉴스에도 홍콩에 격렬한 민주화 항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언론들은 이를 ‘홍콩 시위’라고 한다. 항쟁인가? 시위인가? 운동인가? 시대의 흐름에 쉽게 벗어날 수는 없으나, 말의 진위를 알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