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8.31 1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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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의 듬직한 뒷모습을 상상으로 꿈을 꾸는데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른다
능라란 생각 밖으로 수수한 무명의 치마저고리가 눈에 정겹다
곧장 좀이 쑤시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는 복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그동안 덕배는 평소와는 달리 황소처럼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뭘 알고 그러는지 입으로 줄줄이 물던 담배는 일절 끊고는 복녀가 무거운 것이라도 들라치면 바람처럼 나타나 만류하고 들었다. 공주마마에 왕비 대접도 그런 대접이 없어 지극정성이다. 그런 와중에 어디서 얻었는지, 아니면 품앗이 차 벌충으로 받아왔는지 지게에다 볏단을 바리바리 져서는 마당 가득 쌓는다. 그러기를 서너 차례, 좁은 마당 가득히 쌓이자 혼자 끙끙거리며 날개(‘이엉’의 방언)를 엮어가기 시작이다. 아마도 올가을에는 초가지붕을 새로이 단장할 모양이었다. 지난 가을날에는 복녀의 깨알 같은 잔소리가 성가시다며 주먹만 휘둘렀던 덕배다. 하루 같이 빈둥거려가며 차일피일로 미루더니 결국은 지지난해에 이어 이태를 거르고 말았다. 그 결과 장마철이면 비도 새고 노래기, 좀 벌레, 공 벌레, 굼벵이에 온갖 벌레가 방바닥으로 벽으로 바글거렸다. 삼복더위가 제철인 듯 날이면 날마다 잡다하게 이는 통에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한데 잔소리가 없었는데도 홀로 끙끙거려 씨름이다. 어느새 용마루까지 야무지게 마무리 짓고는 남은 볏짚으로는 새끼를 꼬느라 열심이다. 덕배가 앉은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일 때마다 한 발씩 불어나는 새끼 타래를 볼 때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궁금을 참을 길 없어 덕배가 잠시 잠깐 자리를 비운 어느 날이다. 기어이 요모조모 살펴보는 복녀다. 한데 그중에 이상한 새끼 타래 한 토막이 눈에 들어왔다. 별로 길지가 않아 약 5~6m 정도에 다른 새끼와 달리 외로 꼬였다. 한참을 이상 타 찬찬히 살펴보던 복녀는 본래의 자리에 곱게 사려서 표 안 나게 놓아두고는 이번 창고 정리 때 미향 어미에게 물어보리라 다짐이다.

일찍이 집을 나서는 복녀는 스스로 일등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벌써 몇몇 아낙들이 앞질러 걷고 있다. 걸레라도 빨아 대청마루라도 훔치고자 나섰는데 뒤 쳐졌다는 생각에 걸음아 날 살려다오 재촉이다. 한참을 정신없이 걷다가 눈을 들자 햇귀가 뿌옇게 내리는 길 저만큼에서 덕배는 그간 알고 지내던 동네 사람들과 한통속으로 어우러졌다. 물에 뜬 기름처럼, 낙동강 오리 알 신세 같았던 며칠 전과는 딴판으로 헤벌심 웃어가며 수인사로 바쁘다. 그런 가운데 아낙네들도 어깨를 나란히 저마다 바쁘게 잰걸음이다. 그 모습에 복녀도 질 수 없다며 덩달아 부지런한 발걸음인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선 미향 어미가 같이 가자며 허리를 감싸 안는다.

한데 지게를 지고 가는 남정네나 손을 가슴에 웅크려 품어가는 아낙네들 모두가 한결같이 웃고 있다. 이는 아마도 나락 한 가마니가 가져다주는 행복만 같았다. 복녀도 이와 다르지 않아 자연스럽게 얼굴 가득 한한 웃음이다. 기우는 햇살 아래 나락 가마니를 지고 가는 덕배의 듬직한 뒷모습을 상상으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른다. 그 순간 복녀는 한치에도 못 미치는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틈틈이 결심이던 야반도주의 다짐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랫배만 오지게 차 달라는 기원은 휴짓조각으로 가뭇없이 잊고는 실없이 웃는단 말인가?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가장 먼저 행랑어멈이 반긴다. 어째 이리도 일찍 왔는가? 아기를 가진 젊은 새댁이 새벽잠도 없냐며 반가움에 겨워 신발을 꿰기가 무섭게 마당을 가로질러서는 복녀의 양손을 와락 잡는다. 그 모습이 우여곡절로 시집살이 십여 년 만에 친정을 찾은 무남독녀 외동딸을 맨발로 맞는 친정 어미처럼 다정다감하다. 그때 옆으로 섰던 미향 어미가 살그머니 다가서더니

“혹 몰라서 넘어질란가? 몸 안 상하게 금이야 옥이야 부축해서 왔네요!” 공치사처럼 말을 하는데 복녀는 그저 어리둥절하다. 덕배와 마찬가지로 찬밥신세가 어제 같았는데 무슨 이야긴가 싶다. 이와는 달리

“아~ 자네가 그랬는가? 고맙네~ 그래 그럼 인자부터 나는 우리 이 애 복녀를, 자네를 의지로 굳게 믿겠네! 그리고 수고하는 김에 오늘도 꺽쇠 어미랑 잘 상의해서 우짜든지 잘 부탁하네!”

“야~ 그야 이를 말이라고요! 당연하지요! 그럼 지는 이만!” 미향 어미가 저쪽으로 발걸음인데 복녀는 이 무슨 대화일까 싶어 멀겋게 행랑어멈의 얼굴만 홀린 듯 보고 섰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멀어져가는 미향 어미의 뒷모습과 행랑어멈을 번갈아 볼 뿐이다. 단지 해코지가 아니라는 것에 입으로 말을 물어 목구멍으로 삼키는데 잡은 손을 쓰다듬는 행랑어멈이

“그래 복녀야 그 몸으로 그간에 배는 아니 곯았고? 잠은 잘 자고 별일 없었지러?” 묻는다.

“야~ 어멈 덕분에유! 그라고 어멈유~ 갖은 양념에, 옷감에 뭘 그리도 많이~ 고마워유~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그라고 지~ 지는 유! 오늘 저기 저~ 거~ 뭐시기라! 없는 솜씨에 허드렛일에 보탬이라도 될런가 해서 서둘러 온다고 오긴 왔는데유! 칠칠치 못해 이렇게나 늦어 버렸네유!” 겸연쩍게 웃는다.

“그깐 기 다 뭐라꼬! 있는 것에서 이웃끼리 조금 나눈 것뿐인데! 은혜랄 것도 없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어~ 그라고 늦기는 뭘 늦었다고 그래!” 헤벌쭉 웃는 행랑어멈은

“아~ 일이야 고양이 앞발이라도 빌려 쓰고 싶을 정도로 널렸네만, 하지만 복녀야~ 그 몸에 너는 세상없어도 오늘 일 없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녀를 잡아끌어서는 앞장이다. 완력에 못 이겨 넘어지지 않을 만큼 끌려가던 복녀가 기어이 한마디다.

“어멈은 일이 지천으로 널렸다면서 일거리는 뒷전으로 어디로 가는데 서둘러서 이러신데유? 이유나 좀 알고 가도 갈 걸 그래야 할 것 아닌가 베유!”

“응~ 그게 하여튼 가보면 알거야!” 잡아끌더니 어느 방문을 여는데 아리따운 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 맞는다. 결국에 복녀는 행랑어멈의 손에 강제로 이끌려 고모의 방으로 인도된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항 앞에 당황한 복녀가 멍하게 고모를 보고서 두 눈만 껌벅이는데 새물내가 코끝으로 상큼하다. 능라란 생각밖으로 수수한 무명치마저고리가 눈에 정겹다.

“어서 오세요! 지난날 이래저래 받은 은혜도 있고, 겸사겸사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어 무례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청했네요!” 방석을 내어놓으며 편하게 앉으란다. 하지만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여전히 망설이는 복녀에게 행랑어멈이

“아~ 이분은 이 집의 작은 마님으로 연배도 복녀 자네와 얼추 비슷할 걸세! 그러니 어려워 마시게!”

“아~ 네~네! 그려셔유?” 엉거주춤 자리하는데 행랑어멈이 미리 준비한 다과상을 두 사람 사이에 놓고 나간다. 상에는 다식판으로 곱게 찍어낸 듯 국화 문양 등의 약과와 함께 청자색으로 말간 찻잔 속으로 든 가을이 산뜻하다. 노란 소국(小菊) 서너 송이가 맵시를 뽐내며 소담스럽게 피었다. 먼저 주인 입장의 고모가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복녀 앞으로 내밀어

“국화차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렇더라도 맛이라도 한번 보셔요!” 권하자

“야~ 작은 마님! 고맙습니다” 조심스레 받아들고 한 모금 무는데 입안으로 가을 향이 진하다.

“한데 내 들어 알기로 자네도 아기를 가졌다면요! 나도 그래요! 그러니까 어려워 말고 오늘은 내 집이려니 여겨 안방마님을 흉내로 차나 들면서 마음 놓고 푹 쉬었다 가셔요! 자네나 나나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가 아닌가요?”

“야~ 저기 저~ 하기사 그렇기는 하지만서도유! 어째 저같이 미련하고 천한 것이 벼락 맞을 짓으로 감히 안방마님 흉내는 무슨, 마님과 자리를 나란히 할 수 있간디유! 그저 저 같은 소 돼지나 다름없는 천것은 일에 묻혀 세상 물정을 잊고 사는 것이 천직으로 본분인데유!” 죄인처럼 손바닥만 비벼 방바닥만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앉았다.

“무슨 그런 낮추어 얕잡은 말을,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소 돼지라니, 그리고 사람에게 상하가 어디 있고 귀천이 따로 있다던가요?” 다독이며 곧장 좀이 쑤시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는 복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복녀는 고모의 안내에 따라 방안을 두루두루 구경이다. 그마저도 얼마를 못가 싫증이 일어 자꾸만 방문으로 눈길이 간다. 그제야 복녀의 마음을 눈치챈 고모가 못 이기는 척 놓아준다. 하지만 밖을 나와도 여전히 할 일을 찾지 못해 이곳저곳만 기웃거리는 복녀다. 그 모습에 꺽쇠 어미가 눈살을 찌푸려서는 호들갑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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