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사르트르의 실존과 본질
[인문의 창] 사르트르의 실존과 본질
  • 장기성 기자
  • 승인 2019.02.28 10:28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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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 위키백과
장 폴 사르트르.                                위키백과

 

최근 아리송하지만 이목을 끄는 말 가운데 하나가 ‘졸혼’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한 번 해보고 싶지만 아무나 못하니 이 말의 주가가 치솟는지 모를 일이다.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한때 ‘황혼이혼’이란 말이 시중에 떠돌더니 생뚱맞게도 이혼은 하지 않되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즐기는, '혼인'과 '이혼' 사이 중간지대인 '졸혼'이라는 개념이 비집고 들어왔음직하다. 졸혼이란 말과 뉘앙스는 좀 다르지만 ‘계약결혼’이란 말이 한때 세상을 들썩인 적이 있다. 뭐든 한걸음 앞선 행위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비난받지만, 질투의 화신으로 포장되기 일쑤다.
프랑스의 소설가 장 폴 사르트르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계약결혼을 처음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계약결혼은 당시 도덕주의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평생 구설에 올랐다. 어쨌든 그들은 계약결혼 상태를 50년간 유지했다. 둘 사이에는 수많은 위기가 있었으나 관계는 사르트르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고, 보봐르는 사르트르 사후 인터뷰에서 "사르트르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우리의 삶이 그토록 오랫동안 조화롭게 하나였다는 사실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계약결혼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가치관을 바탕하고 있다. ’실존과 본질‘, 도대체 뭐길래 여태껏 세인에 회자되고 있을까?

 <사르트르와 보봐르>

우리 인간이 만드는 모든 사물은 본질이나 용도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톱의 본질은 썰기 위한 것이다. 이런 본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톱을 만든다. 썰지 못하는 톱은 톱이 아니다. 의자도 누군가 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의자의 본질은 앉기에 있고, 앉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이 같은 본질의 속성을 우리 인간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무슨 용도를 염두에 두고 임신할까? 사물에 적용했던 것처럼 쉽게 대답하기에 참 난감하다. 인간의 경우에는 사물의 본질과는 다르게, 태어날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임신한 어머니가 배속 태아에게 특정한 직업을 갖도록 부단히 태교할지라도 뜻대로 성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통령, 과학자, 예술가, 변호사와 같은 직업을 갖도록 어머니가 소원해도 통할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사물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이 다르다는 반증이기도하다.

사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어떤 목적과 상관없이 그냥 세상에 내던져졌을 뿐이다. 그저 목적 없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출생(?)의 허무를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역설적으로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지’를 펼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인간은 톱이나 의자의 본질과는 달리, 태어날 때 부여받은 책무가 없으니 성장하면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야하는 존재다. 이 처럼 ‘실존’이란 인간의 무한한 선택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뜻한다. 의자나 톱의 입장에서는 무한정 주어진 선택의 자유가 부럽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에 늘 고뇌하고 불안에 휩싸이기 일쑤다. 그래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려 들기도 한다. 선택의 폭이, 선택의 자유가 너무 넓고 많기에 누가 나를 옮아 매주기를 바랄지도 모를 일이다. 아름다운 구속이랄까!

경찰이나 군인은 국가가 부여한 역할에만 안주하며, 무한한 자유의지에서 벗어나려 한다. 종교인은 종교가 계시하는 의미만을 쫓음으로써 자유의지에 바탕한 실존적 삶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언필칭 ‘자기기만’이라 부르며, 양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로 간주한다. 떠맡음과 책임지기를 통해서 자유를 회피하는 행동과 다름 아니다. 무한한 자유가 행복을 담보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로 돌아가 보자. 이라크 전을 수행하던 미군장교가 있었다. 특수부대원들을 이끌고 테러범의 소굴을 소탕하러 작전수행에 나섰다. 가는 도중에 들판에서 양치기 소년 세 명을 만나게 된다. 평범하고 순박한 양치기였고 무장도 하지 않았다. 장교는 고민에 빠진다. 만약 살려서 돌려보내 주면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될 수 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아무 잘못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꼴이 된다. 죽여야 할 것인가, 살려주어야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제도나 윤리가 만들어 놓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않은 것일까? 작전 수행을 위해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결국 장교는 기존 윤리가 만들어 놓은 본질에 의거해서 이들을 살려 주게 된다. 본질이 실질을 앞서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후 자신들의 이동경로가 양치기에 의해서 테러범에게 알려 짐으로써 그 장교는 휘하의 16명 부하병사를 잃게 된다. 장교는 이후 3명의 양치기를 살려둔 것을 후회한다. 앞으로 똑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 절대로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이 다짐이야 말로 실존이 본질을 앞서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인간’은 이처럼 시대나 장소, 상황에 따라 ‘본질’을 규정하는 보편적 원리가 여러 개 존재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사물’의 경우에는 한번 본질이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다. 칼의 본질이 어떤 경우든 바뀌지 않듯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제도나 윤리에 의해서 만들어 놓은 ‘본질’에 따라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선택하거나 결정하니 늘 불안하고 불완전하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자신의 ‘본질’이 순간순간 규정되니.

얼마 전 주말 내내 촛불이나 태극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서는 이유도 한 인간의 ‘주체적인 실존’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채, ‘주변에서 만들어 놓은 본질’만을 쫓은 결과는 아닐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이유는 노벨위원회의 평가기준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에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도 잘못이지만, 이러한 방식은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그럴싸한 ‘본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 자체가 ‘본질’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제도권에서 금과옥조처럼 만들어 놓은 ‘본질’은 내 주체적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어떤 큰 상이나 명예를 얻게 될 경우, 자신의 독자들을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있다. ‘작가 사르트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작품과 ‘노벨 문학상 수상자 사르트르’라고 하는 작품은 가치가 완전히 다르다. 작가가 노벨상이란 큰 명예를 받게 되면 자신에게 이 명예를 준 기관이나 협회와 관련이 맺어지게 된다. 예컨대 시리아의 내전에서 반군세력에 대해 동정심을 갖는 것은 작가 자신과 관련된 일이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 사르트르’가 시리아 반군을 지지한다고 하면, 이는 노벨상 기관의 권위를 이끌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작가는 비록 가장 기쁜 영광을 수여받게 되더라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존이 본질을 앞서야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그래서 노벨문학상을 쉽게 거절했다. 자기 자신이 그 어떤 기구나 제도에 관련되는 것에 이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노벨상을 거절하기 이전에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뢰르 훈장’을 마찬가지 이유로 거부한 바 있다. 세기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보봐르와의 ‘계약결혼’도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니 지극히 사르트르식의 합리적 계약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소설 ‘자유부인’은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고 나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교수 부인의 탈선을 통해 퇴폐한 사회 풍조를 다루고 있어 많은 화제를 모았다. 당대 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선정적인 주제였는데,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황산덕은 이 작품을 일컬어 “중공군 2개 사단(50만 명)에 필적할 만큼 사회에 위험한 요소”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저자인 정비석은 이에 대해 “폭력단 이상으로 무서운 무지에서 오는 폭언”이라고 반박하였다. 이 책은 4만부가 단시간에 팔려나갔다. 사르트르와 정비석의 생각에 언뜻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실존이란 둥지에서 말이다. 뭐든 한걸음 앞선 행위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비난받지만, 질투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