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자유가 있고 선택을 해야 하며,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
인간은 태어나게 할 자유는 있으나 태어날 자유는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목적론적 존재론을 주장했다. 사람도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목적은 바로 최고의 선(善)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s)는 이에 반대하였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 없이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일정한 목적이라는 본질이 먼저 있고 이 본질에 따라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본질은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유명한 말이다.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이 의자의 본질이다. 본질에 충실한 경우에만 의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앉기 위한 목적이 아닌 ‘보기 위한’ 쇼 윈도우 전시용 의자는 의자가 아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의 경우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날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태어나기 전에 미리 의사나 법률가, 회사원이라는 본질을 갖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태어난 다음에 본질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람의 경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우리 인간에게는 예정된 본질이 없기 때문에 본질에 의하여 구속당할 것이 없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자신의 존재이유와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창조적 존재이다.
이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절대적 자유가 있다. 마음 내키는대로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소극적인 자유가 아니고 자유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말한다.
이에 사르트르는 그의 저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에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또는 단죄, 처단)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선택의 자유가 있음과 동시에 반드시 그 자유를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선택을 하지 않을 자유는 없는 것이다. 흔히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것뿐이다”라고 한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라고 하였다. 인간은 실존하기 때문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에 직면하게 되며, 순간순간 선택할 자유가 있고 또 선택을 해야 하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스스로 바라는 삶의 모습을 계획하고 이에 모든 것을 던짐 즉 투기(投企)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만들고 스스로 자기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즉 자신의 삶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질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과거는 잊자. 현재 자신의 실존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미래에 투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선택에 책임지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