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4)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4)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9.08 0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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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가 복녀는 오랜만에 배가 봉긋하게, 포식한 듯 오지게 먹었다
살갗이 문드러지게 뽀독뽀독 문질러 씻었다
책이란 남녀노소 구별 없이 그 누구나 읽으라 있는 것인데 뭐가 어때
지난해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지난해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이것 보게! 복녀! 자네는 어쩌자고 그렇게 칠라닥팔라닥 쏘 댕기길 다니니? 오늘 자네는 작은 마님 말벗만으로 우리네 일 두 배 세 배만큼 자네 몫을 다하는 것이여!” 이리저리 기웃거리지 말고 적당히 바람을 쐬었으면 얼른 들어가란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에 미련이 남는지 복녀는 일삼아 부엌을 기웃거린다. 세상 사는 이야기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지짐이 판도 넌지시 넘겨보며 귀를 기울인다. 방정맞은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사이사이를 넘나드는데 이번에는 미향 어미가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 이끌더니 곱게 눈을 흘겨 은근히 타박이다.

“이것 보시게 복녀 동상~ 아~ 이 사람아~ 그 몸에 동상이 그러고 다니니 꼭 작은 마님이 보낸 밀사 모양으로 감독관 같아 내 보기에 안 좋네!” 대충 둘러 봤으면 얼른 방으로 들어가란다. 게다가 복녀의 점심상은 여기에 없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돌아오는 복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고모가

“그래 자네가 어떻게 할 일이 어디에라도 있던가?” 환하게 웃는다.

“아~ 아니 그~ 그기유! 작은 마님유!” 말끝을 흐리는데 이른 점심상이 뻑적지근하게 들어 온다. 밖의 상이나 마찬가지로 상에는 없는 것이 없어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다. 그때 복녀는 머리에 털이 나고서부터 지금껏 앉아서 상을 받는 이런 대접은 처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늘 차리기만 했지 제대로 된 생일상 한번 못 받아본 터라 절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는 아마도 할머니가 지금의 마님을 처음 만난 그날 풍경의 재현만 같다. 아무튼지 오늘따라 어미를 생각한 때문인지 배속 아기마저 잠잠하여 한결 수월하다. 그래서인가 복녀는 오랜만에 배가 봉긋하게 일도록, 포식하듯 찰지게 먹었다.

그 때문인지 행랑어멈이 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낮잠이 쏟아진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으로 무겁다. 백약이 무효로 오는 잠을 쫓아 보고자 눈을 부릅뜨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헛일이다. 그러다 문득 문갑 위로 눈길이 머무는데 소설책으로 보이는 몇 권의 책이 가지런하다. 한참을 멍한 눈으로 뚫어질 듯 쳐다보는데 이를 눈치챈 고모가

“어떻게 자네는 글을 아는가?”

“야~ 대충 어사무사하게 읽을 정도는 유!” 수줍게 말하는 복녀는 양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천륜으로 따지자면 증오하거나 미워해야겠지만 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장통에서 앞날이 기약 없는 자신을 거두어 때에 맞게 새 옷으로 입혀주고, 배 안 곯게 삼시 세끼를 따뜻한 밥으로 먹여주고, 무명이불이라 할지라도 잠자리를 골라가며 고이 재워줬다. 나아가 사람이라면 남녀를 불문으로 배워야 한다며 글까지 가르쳐 준 탓에 친아버지 이상으로 따르며 존경했다. 그런 까닭에 복녀는 양아버지 말이면 법으로 알아서 따랐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는 형상이 사람이지 사람 같지가 않아 가증스럽게 보였다. 증오의 대상으로 짐승만도 못해 옆에 오는 것조차 소름이 끼쳤다,

복녀를 맨 처음 거쳐 간 사내는 다름 아닌 덕배다. 방문을 넘어설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겁에 질려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평소 마음에 둔 탓일까? 여자의 예리한 촉에 의해 단박에 덕배란 것을 알아보았다. 단지 부끄럽고 쑥스러운 통에 짐짓 모르는 척했을 따름이다. 부드러운 듯 묵직하게 눌러오는 젖가슴을 압박으로 은연중 다리라도 들었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이다. 처녀라는 아픔을 망각으로 무의식중에 옆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을 냈을까 수줍었다. 그런 때문에 복녀는 떠나려는 찰나에 평소 마음에 둔 덕배가 덥석 손을 잡아서 같이 살자며 다가올 때 마음이 들떴다. 지난 과오(過誤)를 속죄로 알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단지 한 번에 응하면 쉬운 여자로 여길까 싶어 두어 번에 걸쳐 튕기는 척으로 내숭을 떨었다. 가슴앓이로 남은 첫정으로 적당히 불을 지폈다. 그런 한편으로 밴댕이 소갈머리의 덕배가 삐치는 등으로 철새처럼 떠날까 싶은 조바심으로 이불을 둘둘 말아 밤을 지새웠다. 이는 복녀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탓에 더욱 애가 달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덕배 혼자만이 복녀를 거쳐 갔다면 당당하게 나서겠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덕배가 부지불식간 복녀를 덮친 이후에도 두 사람이나 더 불한당으로 몹쓸 짓이다. 그중 한 사람이 양아버지다. 양아버지가 검은 양말을 뒤집어쓰고 방문을 열 때부터 복녀는 느낌으로 단박에 알았다. 양아버지를 받아들이는 복녀는 더 없는 세상 슬픔을 느꼈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이 몸뚱이가 다 뭐라고? 속으로 피눈물을 뿌리는 것으로 가슴에 묻었다. 그 일로 인해 어쩌면 삶에 의미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나날이 우울했다. 다음날부터 방이 싫었다. 이후로는 절대 혼자 있지 않았다. 그런다고 지나간 밤의 역사가 지워지지는 않았다. 날이 밝자 단원들 내에서는 불미스러운 소문으로 자자하다. 졸지에 딸에서 후처가 되었다며 벌레를 보는 듯 외면이다.

이는 그 누군지도 모르는 두 번째하고 차원이 달랐다. 두 번째는 정말 소리 소문이 없이 감쪽같았다. 동네북도 아니고 뒷맛은 고약했다. 기분은 더럽고 수치심으로 죽고만 싶었다. 늙은 이모의 평소 충고에 따라 즐기지 않으려면 산송장이라고, 통나무로 처신했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찝찝하고 끈적끈적한 아랫도리를 할 수만 있다면 칼로 도려내고 싶었다. 할 수 없이 복녀는 수돗가를 찾았다. 죽자사자 대야 물에다 씻고 또 씻었다. 살갗이 벌겋게 문드러지도록 뽀드득뽀드득 문질렀다. 그렇다고 머릿속에 든 더러웠던 시간까지는 씻어 낼 수가 없었다.

이후로 복녀는 실없이 당한 억울함을 풀고자 틈틈이 색출을 꿈꿨지만 허사였다.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늘 의문으로 남았는데 그놈이 스스로 찾아왔다. 제 발로 복녀를 찾았을 때는 남사당패가 해체되던 마지막 날이다. 너나없이 떠나는 마당에 뜻밖에 인물이 찾아와 귓속말로

“복녀야 어디를 가더라도 잘 살아야 해! 부디 행복해야 해! 복녀야 저기 저~ 미안해!” 생뚱맞게 부려놓는 걸걸한 목소리가 그날 밤의 바로 그놈이었다.

그때 복녀는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예리한 감으로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그놈임을 단박에 알았다. 그렇다고 닭 모가지 비틀듯 잡아 족치고, 책임도 못 질 일을 왜 그랬냐고 얼굴을 손톱으로 파가며 따지고 싶었지만 모르는 척 얼버무렸다. 큰소리에 그 흔한 욕지거리는 물론 입도 뻥긋 못했다. 그간에 벼른 칼날은 다 어디로 가고 어쩐 일인지 바보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탓일까? 그보다는 이성이 감정을 앞장으로 다독이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그때 복녀는 부부의 연을 맺자며 손을 뻗쳐온 덕배와의 행복한 미래를 더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정신 줄을 놓은 백치아다다(계용목 단편소설 제목이자 여주인공)처럼 맹탕으로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잘잘못을 떠나 그러한 씻을 수 없는 과거가 복녀의 발목을 잡는다. 뱀의 유혹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그것도 여자로 태어난 게 원죄라면 죄란 말인가? 주홍글씨처럼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점차 심신을 옥죈다. 어쩌면 덕배는 진즉부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시도 때도 없이 들먹거려 음탕한 년으로 몰아붙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덕배의 구밀복검(口蜜腹劍) 같은 감언이설에 녹아난 복녀는 제 죽을 지리인지도 모르고 부나방처럼 찾아들었단 생각에 하늘이 노랗다. 그렇게 기막힌 과거를 들추어 복녀가 절로 한숨인데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읽어 보시게요?” 권하는 고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복녀가 정신을 차려 겸연쩍게 웃으며

“아~ 예~ 저~ 저가 짜장 그래도 돼남유?”

“아~ 그~ 그럼요! 책이란 남녀노소 구별 없이 그 누구나 읽으라 있는 것인데 뭐가 어때서요!” 고모는 맨 위의 책을 집어서는 불쑥 내미는데 복녀가 받아들고 보니 ‘흥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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