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투에 참전한 향군 회원들이 2년 전만 하더라도 몇 명 생존해 있었으나, 지금은 90세를 훌쩍 넘은 고령으로 거의 작고한 실정이다. 일부 무공수훈자는 요양원이나 자택을 방문해서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지만, 찾아가도 청각장애와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있어 증언 듣기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칠곡군에는 220명의 참전 회원이 있다.
회원 21명이 있는 지천면의 경우 거동할 수 있는 회원은 10명 정도나,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이는 3명이라고 한다. 거동하지 못하는 다수 회원은 요양원이나 자택에서 나라를 위해 싸운 젊음을 회상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학산 인근 전투에 참전해 전세를 뒤집고 6사단 19연대가 평양을 거쳐 평북 원종리에서 100km 거리인 신의주까지 진격한 회원도 있다.
'대한민국 武功수훈자 경북지부 칠곡군지회' 김화석(88) 지회장 등 여섯 분의 당시 증언을 들어본다.
김 지회장은 "유학산과 멀지 않은 영천군 신녕면 갑티재 전투에 참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7월 25일 입대하였으나, 아직 전선에는 총도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수류탄 10발씩만 지급받을 정도로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개소리만 들려도 수류탄을 투척했다. 중요한 요충지라 이승만 대통령도 신녕역에 하차하여 '우리는 뭉쳐야 한다'는 메시지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측근에서 보았다. 이후 전세가 더욱 악화하여 융단폭격이 감행되었다."라고 증언했다.
신봉윤(94) 씨는 "1사단(사단장 백선엽 장군) 12연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사선에 엎드린 옆 전우가 엄마를 찾으며 비명에 죽었다. '잘해라'고 격려해주던 형 같은 선임도 죽어 있었다. 유학산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전쟁 때에는 융단폭격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융단폭격 직후 38선 동부전선 포병부대에 배치되었다. 입대 동기 등 가까이 지내던 전우들이 눈앞에서 일어나, 목숨이 두렵지 않은 증오심에 불탔던 전투를 했다"라고 회상한다.
오종환(91) 씨는 "6・25전쟁 직후 입대하여 1사단 12연대 수색대에 배치받았다. 제대 후 알고 보니 1사단(사단장 백선엽 장군)에 신봉윤 형님과 같은 사단에 있었다. 칠곡 다부동 전투 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싸웠던 전우가 적군의 실탄에 나뒹굴어지고, 피를 토하며 누군가를 부르며 죽어가는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방아쇠를 눈감고도 당겼다. 강원도 영월 전투에서 부상당해서 후송되었고, 경기도 연천 전투에서 또다시 부상당하여 18육군병원으로 후송되기를 반복하였다. 제대 만기 몇 달 남겨두고 상이군인(傷痍軍人)으로 제대하였다."라고 증언했다.
배석문(88)씨는 "칠곡군 유학산 인근에 다부동 전투 방위대에 배치되었다. 그 와중에도 물자보급 비리가 왕성하여 대대장급들이 영창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융단폭격 후 북진 대열에 끼었다. 발바닥에 콩 물집이 터져 쓰라린 통증을 참으며 행군하는 도중에 끼니 공급조차 원활하지 못하여 허기와 갈증을 겪었다. 군화를 벗어놓고 물 한 바가지 마시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다. 평안북도 개천의 민가 외양간 축사에서 허기를 채우고 희생된 가축에게 명복을 빌어줄 겨를도 없이 또 행군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배고픔과 끝없는 행군, 부르터진 발바닥 콩물집뿐이다."라고 말했다.
박경석(91・약목 분회 총무) 씨는 "6・25전쟁 직후 학도병으로 영천 7사단 8연대에 입대해 있다가 북진 때 평양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함흥으로 진격할 때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소문으로 원산까지 내려왔으나, 피난민 행렬로 발붙일 틈이 없었다. 다시 제천으로 내려오다가 중공군에 체포되어 1년 8개월 간 포로 생활을 했다. 당시 대동강의 대홍수로 혼란한 틈을 타서 선배 4명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하여 40여 일 동안 산중에 은둔하면서 나무껍질 생식으로 살았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서 "대구 보충대 생활 중 소속 대대장을 피살 직전에 구출해 주기도 했다. 대대장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는 인민군 상사를 내가 뒤에서 사살한 것이다. 대대장은 앞으로 뛰쳐나가고 나는 뒤로 빠져나왔다. 도망쳐 달아나다가 고관절 다리뼈 함몰로 부상을 입고 지금까지 상이 장애인으로 지낸다. 당시에는 전사자가 많아 기강이 해이해지고 집으로 도망간 전우도 많았다. 이들은 아군의 경계망 밖에서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거의 전사했다."라고 회상했다.
종전 5년 후인 1958년, 50사단으로부터 유골 봉송 통지서를 받은 수백 명의 가족들이 왜관 순심중학교 교정에서 유골을 봉송해 갔으나, 전사자 유골의 DNA도 확인하지 않은 채 살아 있는 생존자의 이름으로 발송하여, 유골함을 받은 제대 장병들은 자신의 유골이 아니라며 낙동강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낙동강에서는 유족들의 꽃송이 헌화가 많았다.
지천면 6・25 참전 전우회 총무인 장정기(90) 씨는 "유학산 전투가 치열했던 7월 하순, 당시 스무 살로 동네 마을을 배회하던 중 총을 든 군인의 부름에 주눅 들어 1사단(사단장 백선기) 12연대 임시 부대에서 민간인 사역으로 고역을 치렀다. 짐이라도 짊어질 수 있는 남성이면 불러 강제 도우미로 활용했었다. 우리 동네에서 산 하나 넘어, 멀지 않은 303고지 '쑥더미’ 임시 진지에서 실탄, 포탄, 쌀가마 나르는 임무가 주어졌었다. 취사반에서 밥도 해서 날랐다. 애국도 좋지만 죽을 맛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부대의 후퇴 명령으로 어느새 군인들이 사라져 버렸을 때는 귀띔도 해 주지 않은 군인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집으로 가는 도중 백운동 질부마을에서 임시부대 군인들에게 다시 붙잡혀 7일 동안 노역했다. 내가 가져다준 무기로 전투가 치러졌다. 솔직히 가족들 걱정에 달아날 궁리만 했다. 세 번째 또 붙들려 칠곡초등학교 진지부대까지 왔다. 당시 적들은 이미 낙동강을 넘어 팔달교 입구까지 포진하고 있었다. 이듬해 정식 입대하여 미군 부대 진지에서 복무했다."라고 말했다.
김화석(88) 지부장은 6・25전쟁 수훈자로서, 국립영천 호국원 ’대첩 비 무공 전적비‘에 명단이 등재되어 있다. 그는 "피란민 피해자 가족에게는 송구하나, 융단폭격 작전은 한국 국운이 걸린 최후의 결단으로 승리의 주역이었다. 만약 융단폭격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칠곡군청 게양대에는 인공기가 펄럭거렸을 것이다."라며 거듭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