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의 대들보를 우리가 지키자
임청각의 대들보를 우리가 지키자
  • 안영선 기자
  • 승인 2024.10.22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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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대구문화유산지킴회(회장 서상한) 임원단 25명이 2024년 10월 21일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주최하고, 안동문화유산지킴회가 주관하는 '오백년 임청각 대들보를 지켜라'  행사에 참여했다.

명덕로타리 근처 사무실에서 08시 30분 버스가 출발하여 군위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안동 임청각에 10시쯤 도착했다. 안동문화유산지킴회의 김호태 회장께서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이하였다. 임청각 군자정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군자정 앞에서. 안영선 기자

행사에 참가한 임원들은 4인상으로 차려진 차와 다과상을 받고 담소를 나누며 김호태 회장에게 임청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임청각은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시구를 빌려 이름을 지었다. 임청각은 보물 제 182호로 조선시대 민간 가옥 중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주택으로 5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임청각은 사당과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 그리고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울어지게 배치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반가 주택이다. 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99칸 건물중 부속건물들이 철거되어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 있다.  지금 철로는 이설되어 도로가 되었다.

고성이씨 종가 임청각은 1519년(중종 14)에 낙향한 이명이 지었으며, 1767년 봄에 허주 이종악(1726-1773)이 고쳐 지었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을 비롯한 선생의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이병화, 손부 허은,  당숙 이승화까지 11명의 독립운동가가 건국훈장을 받은 역사의 현장이다.

차와 다과를 곁들인 담소를 나눈 뒤에 우리는 '북간도의 바람소리' 연극 단원들이 펼치는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이상룡'의 연극을 보고 연극이 끝난 뒤 우리는 독립운동의 소중함을 느끼며, 조상들의 고마움에 독립 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는 회원들. 안영선 기자

연극을 보고 난뒤 임청각의 부속 건물들을 둘러 보고 독립군 들이 먹었다는 음식들의, 독립군 밥상을 받아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점심으로는 동글동글 주먹밥 4개, 콩가루가 들어간 국시, 돼지고기 수육 ,김치와 더덕무침, 그리고 옥수수와 고구마 동가리였는데 , 더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준비 되어 있었는데, 겸상으로 차려진 것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별당형 정자 군자정. 안영선 기자

부속 건물중 수많은 독립열사와 시인 묵객들이 묵어간 군자정은 조선중기인 1919년(중종 14)에 형조좌랑 이명이 건립한 얀반 주택의 별당형 정자다. 건물의 둘레에 쪽마루를 둘러 난간을 세우고, 서쪽에 내당으로 통하는 주로 주인이 이용하는 출입구 돌층계와 빈객들이 드나드는 남쪽 돌층계와 구분되어 있다. 군자정 쪽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연이 심어진 연못이 보이고 잔디가 심어진 단에는 안동 무궁화 몇 그루가 피어 있다 낙동강과 영남산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이 군자정에서 석주 이상룡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학교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우고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대궐같은 임청각을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지만,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의  최전선 만주에서 싸우다 1932년 만주 땅에서 순국했다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고. 이상룡 선생의 국적은 2009년 회복 되었다.

안동 무궁화. 안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