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노트] 독일⑨ 베를린 근교의 작은 도시 '포츠담' 과 '상수시' 궁전
[여행노트] 독일⑨ 베를린 근교의 작은 도시 '포츠담' 과 '상수시' 궁전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4.09.2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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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은 폭격을 면해서  옛 모습을 간직 한곳이 많다. 우아한 내부 접견실 모습.
'포츠담'은 폭격을 면해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이 많다. 우아한 내부 접견실 모습.

‘포츠담’은 사회 교과서에 등장하는 ‘포츠담 선언’과 드라마 ‘눈물의 여왕’ 촬영지로 귀에 익은 도시다.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5km 정도 떨어진 인구 18만의 작은 도시로 브란덴부르크의 주도이며 오랜 역사를 품은 아름다운 궁전들이 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전철이나 근교 열차를 타면 당일치기 소풍처럼 다녀오기에도 좋다. 게다가 오늘 나들이는 대여섯 명의 동행까지 있으니, 최고의 즐거움까지 예약된 셈이다. 오랜만에 날씨조차 화창해서 겹겹이 껴입은 겉옷 벗어 던지고 가벼운 차림새로 내딛는 발걸음도 가볍다.

10세기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포츠담’은 17세기 이전까지는 작은 마을이었다. 16~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후, 가톨릭이 국교이던 프랑스에서 신구교도 간 종교전쟁이 일어나 많은 ‘위그노(프랑스의 신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건너왔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발표한 ‘포츠담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대거 이주한 ‘위그노 교도’들이 포츠담에 정착하며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는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19세기부터 독일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현재는 3개의 대학과 30개 이상의 연구기관이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포츠담’을 찾는 이유는 ‘상수시(sans souci 프랑스어로 걱정이 없는)궁전’을 보기 위해서다. 누구나 가슴속에 근심을 품고 살아서일까. 화창한 5월 마지막 주말 일찌감치 출발해 ‘상수시 궁전’에 도착하니 한 주일 전에는 겨울이었던 날씨가 셔츠 단추를 풀고 싶을 만큼 화창하다.

아름다운 상수시 궁전.
아름다운 '상수시 궁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상수시 궁전’은 프로이센 왕국의 통치자 ‘프리드리히 대왕’(1740~1786년 재임)이 1747년 완공한 여름 궁전이다. 통일 독일의 기초를 닦은 ‘프로이센 왕국’은 군국주의의 대명사로 불린다. 한때 온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고 수백 개로 분열된 독일의 통일을 주도한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과 산업 기술력을 가졌던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계몽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과 재상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은 세계사 수업시간에 들어본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창기 프로이센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조차 없는 가난하고 약한 나라였다.

16세기 초 유럽에서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중세의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정화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되찾자는 것으로, 그는 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하며 오직 믿음과 성경 말씀을 따르자는 원칙을 주장했다. 추방령을 받고 숨어 지내는 동안 그는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때마침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로 인해 성경은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독점된 지식에서 대중에게로 급격히 전파되었다. 이를 계기로 종교개혁 운동은 확산하였으며 1529년에는 ‘프로테스탄트(신교도)’라는 명칭도 자리 잡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며 정치적 종교적으로 큰 논쟁과 변화를 불러왔다.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 내 많은 지역이 루터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강력한 지역 영주들은 신교와 구교, 두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종교적 갈등은 결국 ‘30년 전쟁(1618~1648)’으로 이어져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였으며 가장 참혹한 피해를 본 곳은 독일이었다. 한 마디로 국토 전체가 전쟁터가 된 것이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겹치며 나라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구의 반 이상이 사망했고 군대의 핵심 통과지역은 인구의 2/3를 잃었으며 몇몇 소도시에서는 사람의 자취가 사라졌다. 손실된 인구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연 회복이 불가능했다. 손상된 인구를 회복하기 위해 프로이센은 ‘종교의 자유’와 ‘세금 유예’를 걸고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인 것이다.

암울한 시기를 지나서 18세기에 프로이센은 왕국으로 승격한 이후 흩어져 있던 각 지역의 개별적 법률과 제도를 통합하고 중앙집권제의 절대국가 체제를 완성한다. 그 후 2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공무원의 부정부패 척결, 농노제 폐지, 무상 초등교육 의무제 등을 도입하며 부국강병의 기틀을 닦는다. 국가 세수의 80%를 국방비에 투입하고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인구 250만의 작은 나라에 8만이라는 정예 군대를 가진 군국주의 나라가 됐다.

이런 나라를 물려받은 프로이센 3대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왕이 육성한 강력한 군대를 활용해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였다. 그가 즉위했을 때 변방 국가였던 프로이센은 그의 치세를 거치며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가진 유럽의 강국이 되었다.

'상수시궁전'은 포도나무를 심어 테라스로 만들었다.
'상수시 궁전'은 포도나무를 심어 테라스로 만들었다.

“통치자는 국가에서 첫 번째 종복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보듯, 그는 군림하는 군주가 아닌 봉사하는 군주의 역할을 실천했다. 선왕이 육성한 강력한 군대를 활용해 영토를 확장했고, 변방 국가였던 프로이센은 그를 통해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유럽의 강국으로 입지를 다졌다. 또한 계몽 군주로서 종교와 사상적 자유와 토론을 보장했기에 많은 인재들이 프로이센에 모여들어서 문화가 꽃피고 정치체제 또한 개선되었다. 군사적 해결에만 집착해 나라를 위험에 빠트리거나 군대를 키우는 데만 골몰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10배 가까운 국력을 가졌던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대등해질 수 있었던 저력은 다른 국가들에 충격을 주었다. 그 후 그는 7년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프로이센의 부흥을 이룬 대왕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풍부한 감수성을 타고났으며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술과 문학을 사랑했다. 또한 강한 나라에 대한 집착으로 아들을 호되게 조련하는 아버지에 의해, 소년 시절부터 군사학과 훈련, 전쟁과 무기에 관한 식견도 키워왔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받아온 무자비하고 강압적인 교육으로 인한 강박적인 성격은 말년이 가까울수록 독선적으로 되어갔다는 후대의 평가도 있다.

'상수시 궁전'에서 분수와 정원 테라스를 지나 2km 쯤 가면 멀리 '신궁전'이 보인다
'상수시 궁전'에서 분수와 정원 테라스를 지나 2km 쯤 가면 멀리 '신궁전'이 보인다

재위 기간 (1740~1786년) 바흐를 궁으로 초대하여 연주를 듣고 그 자신이 플루트를 연주했으며 300여 곡이나 되는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 들은 클래식 음악 프로에서 그가 작곡한 음악을 듣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상수시 궁전은 이런 대업을 일구어낸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은 여름 별궁으로 작은 계단식 포도밭 정원 위에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우아한 연두색 지붕을 받치고 서 있는 궁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또한 일품이어서 정원을 산책하며 신궁전으로 향한다.

드디어 길 끝에 모습을 드러내는 '신궁전'.
드디어 길 끝에 모습을 드러내는 '신궁전'.

7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상수시 궁전 완공 후 20년이 지나서 지은 곳이 신궁전이다. 2km 정도 걸어서 가는 길목은 분수와 정원 곳곳의 건축물이 어울려 멋지지만, 그 풍경 속에서 온갖 짓궂은 포즈와 멘트를 날리며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는 일행들 덕분에 맘껏 웃어댔던 기억만 생생하다. 브로맨스를 연출해 보여주는 한 컷 한 컷의 장면들은 여행의 끝자락 긴장됐던 마음을 한껏 열어 놓는다. 신궁전의 내부는 화려해서 당시의 모습이 재현된 방마다 섬세하고 우아한 집기들과 생활상을 볼 수 있다. 또한 당대의 많은 그림이나 컬렉션들도 볼 수 있다. 베를린과 달리 전쟁의 포화를 크게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해는 우여곡절을 겪고 그의 유언대로 지금은 궁전의 계단 아래 애견 옆에 묻혀있다.

여행의 마무리는 역시 식탁이다. 신궁전을 끝으로 예약해 둔 식당으로 달려간다. 시장기와 해방감은 식욕을 한없이 끌어 올리고 턱없이 많은 접시와 맥주잔이 들락거리자 와르르 웃음이 터지고 목청도 높아진다. 불그레하고 여유로워진 얼굴로 식당을 나서는데 그새 정원의 비어가르텐은 왁자지껄 목소리 큰 독일 사람들로 가득하다. 커다란 나무 잎사귀 그림자가 그들 얼굴과 맥주잔 위에서 여유롭게 일렁인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면 내일은 각자 예약해 둔 비행기 편으로 귀국 길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떠나왔던 자리로 돌아가 일상을 꾸려 나갈 것이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때로는 말을 삼키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면서. 만약에 쉼표가 없는 책을 읽는다면 쉼표가 없는 악보를 연주해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시지포스가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짧은 쉼표 하나. 브레이크 잡지 않아도 되는 감정의 해방구가 없다면 인생은 너무 지루할 것이다.

무심코 돌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마음 열리고, 요가 매트 위에서 들숨 날숨 헤아리는 순간의 명징한 의식, 비 온 뒤 걷는 편백나무 숲의 향기, 파도에 발을 맡기고 걷는 맨발의 해변, 멀리 떨어져 있는 손주들과 나누는 오붓한 채팅의 시간....

나를 나 자신이게 해주는 그 은밀한 쉼표의 순간들에게 감사한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

*시지푸스: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계속 들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인간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 아르헨티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 ‘삶에 감사합니다’